어떤 단어는 그저 그럴싸하게 들린다는 이유로 사용되기도 한다. 음, 저기 걸어오는 저 사람이 왠지 우울해 보이는군.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일단 '사랑한다'는 말을 던져볼까. 음, 정권에 잘 보이기 위해 일단 칼럼에 '창조 경제'라는 단어를 써볼까. 음, 요즘 유행하는 단어라니 일단 제안서에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단어를 써볼까. 음, 사람들이 열광하는 단어이니 성명서에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넣어볼까. 다수가 공분하는 단어이니 '신자유주의'라는 라벨을 붙여볼까. 그런 식으로 사용될 때, 그 단어는 "멍멍!"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차라리 특정 단어를 집요하게 기피하는 사람이 그 단어 뜻을 더 잘 알 수도 있다. 내가 아는 어떤 부부는 단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서로 간에 해본 적이 없다. 사랑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고귀한 뜻을 감안할 때, 감히 부부 간에 사용할 수 없다는 데 상호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남발하며 위기를 미봉하는 이들보다는 이 부부가 사랑이라는 말뜻을 더 정확히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오용되는 단어, 남용되는 단어, 모호한 단어, 다양한 용례가 있는 단어일수록, 신중한 사람들은 해당 단어의 사용을 자제하고, 그 단어를 가능한 한 정확히 정의하고자 든다. (김영민, 『공부란 무엇인가』, 어크로스, 53~54쪽)
저자는 그럴싸하게 들린다는 이유로 우리가 단어를 잘못 쓰고 함부로 쓰는 무지를 꼬집으면서 보다 신중한 단어 생활을 당부한다. 이른바 셀럽 연예인 부부가 방송에 나와 눈꼴사나운 애정 공세를 퍼부으며 잉꼬부부를 과시하다가 하루아침에 서로 갈라서는 소식을 전하는 느닷없음을 자주 목격하곤 한다. 세상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연예인 걱정이라서 파경을 맞았다고 인생 종 칠 리 없지만 안타까운 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해서 일단 비웃게 된다.
남남이 되기 전 연예인 부부가 브라운관에 나와서 수작 떠는 모습은 너나 할 것 없이 닮았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남발하는 게 그것이다. 이미 쇼 윈도우 부부로 전락했으면서도 주변 시선을 의식해 당장이라도 침을 뱉고 싶은 상대 면상에다 대고 "사랑해"(우웩)를 읊는 그들의 농익은 연기는 연기대상 감이긴 하지만 우울하리만치 가증스럽다.
'사랑한다'는 표현은 느글거려 가족끼리는 쓰기 싫어도 '사랑'이란 말뜻에 충실한 배우자로는 살고 싶다. 곧 다가올 결혼기념일(4월30일)이 점점 감흥이 별로 안 이는 연례행사로 전락하긴 했지만 일년 중 그날 단 하루 저녁만이라도 가족들과 다시없는 만찬을 즐기고픈 욕구까지 사그라들진 않았다. 어른 말을 써도 다 알아먹을 만큼 어엿해진 두 딸이 자꾸 옆구리를 찔러 대면 겸연쩍어도 방송에 나오는 연예인 부부처럼 그럴싸하게 생색을 내야 한다.
"마이 무라, 마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