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앞 대목이다. 메뚜기도 한 철이랬다고 제 아무리 역병이 기승을 부린다손 대목 특수를 어쩌지 못한다. 사람들 유독 명절이 가까워지면 목욕재계에 더 신경을 쓴다. 일주일 전에 깎았는데 명절 앞이라고 머릴 또 깎는다. 명절이니 으레 그래야 한다는 사람들 의외로 많다. 이발소(커트점)가 요맘때 바쁜 이유다. 그러니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아니나다를까 대목 앞둔 엊그제 금요일부터 일요일 손님들로 제법 붐볐다. 제법이 어느 정돈지 감이 안 오니까 이렇게 설명하겠다. 머리 커트와 염색을 원하는 손님이 있다 치자. 기술 좋은 원장이 5분 만에 커트를 끝내면 염색약 바르는 데 5분(숙련된 작업자가 3~5분 소요. 고로 내 염색 기술은 현재 수준급! 자랑 좀 했다), 염색 물들 때까지 기다리는 데 20분, 머리 감겨 주는 데 5분, 도합 35분 가량 걸린다. 그런 손님 20~30명이 꾸역꾸역 들어온다면? 염색 안 하고 커트만 하는 비슷한 수의 손님들까지 들락거리면 정신머리 진작에 날아가고 없다.
내 일이라는 게 원장이 커트하기 전 커트보를 두르고 머리에다 대고 분무기를 뿌리는 따위 사전 준비를 하거나 원장이 매조지하기 전까지 손님 머릴 데생하듯 대충 깎는 부수적인 업무가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점점 염색 파트를 도맡다시피 하더니 요즘에는 원장이 토스한 염색 손님을 받아 염색약 바르고 머리 감기고, 바르고 감기고, 또 바르고 "샴푸하시겠습니다!" 세면대로 불러내 머리 감기다 하루가 다 간다. 이리 쉽게 말은 하지만 진짜 고역인 게, 5분마다 끝나는 커트 손님을 받아 5분 안에 염색을 끝내야 손님이 안 밀린다. 아무리 수준급 도포 기술을 가졌다손 5분마다 발라 재끼자면 손아귀가 다 아리다. 머리 감기는 건 어떻고. 매번 허리를 구부려 손님 머리를 감기다 보면 허리통이 끊어질 듯하다. 제아무리 질긴 장갑을 껴도 독한 염색약에 금세 삭아버리는 통에 양손은 물에 젖어 내내 퉁퉁 부어 있다. 주부 습진을 고민해야 하고 아침에 허리 잡고 끙끙 앓은 지가 좀 됐다.
지지난 주 토요일 오후 가게로 한 여자가 햄버거 담은 봉지 두 개를 달랑달랑 들고 들어왔다. 평일 근무하는 직원이라고 자기를 소개했을 때 느낌이 딱 왔다. 내가 금~일 견습하는 가게는 평일, 그러니까 정기휴무일인 화요일을 뺀 월, 수, 목요일도 직원을 쓰는데 바로 그 사람이다. 여기서 일한 지 일 년이 넘었고 내가 들어오기 전까지 주말 근무도 맡았었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잘도 나부댄다. 엄밀히 나는 견습생인데 비해 그니는 미용사 자격증을 소지한 어엿한 정식 직원이다. 평일보다 주말에 손님들이 더 몰리는 가게 특성 상 똑같은 일당에 상대적으로 일이 느슨한 평일 근무는 그야말로 꿀보직이다. 그래서 그런지 마스크 위로 보이는 눈매가 참으로 느긋해 보였다. 살짝살짝 비치는 눈웃음은 '웰컴 투 헬주말!' 놀리는 듯이 느껴져 괜히 비위가 상했다. 토요일 오후에 전격 출동, 의도가 없을 리 없다. 설마하니 주말 근무에 여념이 없는 나를 위로하려고?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
두어 달 전 어느 일요일이었다. 원장이 갑자기 월요일까지 일할 수 있냐고 물었다. 평일 근무 직원이 급한 사정이 생겨 그러니 땜방 근무가 가능한지 여부를 그 직원이 나한테 물어보랬다면서. 도저히 물릴 수 없는 선약이 잡혀 있어서 단박에 거절했는데 좀 얄미웠다. 원장을 통해 그 직원의 면면을 대강 들어 그게 선입견으로 작용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보다 두어 살 아래 연배에 걸리는 것 없는 싱글, 틈 나는 대로 여행을 즐기는 욜로족이라는 점에서 그 사정이라는 게 썩 긴급을 요할 것 같지는 않다는 혐의를 지울 수가 없었다. 일요일과 정기 휴무일인 화요일 사이에 낀 월요일은 4박5일로 일정(금요일~화요일)을 잡은 여행객들에겐 암초 같은 날이다. 놀기 좋아하는 사람은 놀다가 일하고 다시 놀기보다는 주욱 노는 걸 더 선호하기 마련이니까. 같은 가게에서 일을 하는데 누군 쎄가 만발이 빠지도록 일에 치이는데 누군 어떻게 해서든 구실을 만들어 노는 날을 잇겠다는 심보로밖엔 안 보였다. 누굴 호구로 아나.
다시 돌아와 지지난 주 토요일. 그날도 결국 근무를 대신 서달라는 부탁을 본인이 직접 하려고 가게를 들른 것이다. 명절 휴무는 9/18 ~ 9/22, 토요일부터 그 다음 주 수요일이다. 명절 대목이라고 해도 원칙대로면 내 근무일은 9/17~ 9/19, 변함없이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다. 명절에 가게 휴무는 9/21 ~ 9/22, 추석 당일(화요일)과 다음 날(수요일). 그러니 또 월요일(9/20)이 문제다. 가게는 당연히 영업을 하니까. 월요일 근무일만 아니면 9/17(금)부터 9/22(수)까지 6일의 황금연휴인데 일하러 나갈 마음이 생기겠는가. 어떤 꼼수를 써서라도 제끼고 싶겠지. 같잖은 건 땜빵 근무를 부탁하는 그니의 명분이다. 또 피치 못할 사정이었으니까. 명절 연휴에 피치 못할 사정이 뭔지 나는 정말 묻고 싶었다. 하필이면 왜 그니는 월요일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는지도 몹시 궁금했고. 차라리 그냥 여행을 가려는데 월요일이 걸리니 이해해 달라, 나 대신 일을 봐준다면 혹시 당신도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길 수 있으니 언제든지 대신 서 줄 용의가 있다, 솔직하게 말해 줬다면 그나마 곱게 봐줬을 텐데.
9/20 땜빵 서 주기로 했다. 출근 안 하면 어차피 아버지 가게 가서 일손 거들어야 한다. 같은 값이면 차비라도 벌 요량으로 나름 합리적 선택을 했을 뿐이다. 나 역시 그 날 집안에 긴한 일이 있긴 하나 그쪽이 더 급하다 하니 아니 들어줄 수 없겠다고 온갖 생색을 다 내면서 땜빵을 수락하긴 했다. 아, 근데 어째 심상찮다. 당장 엊그제 주말만 해도 일에 치여 넋이 나갈 지경이었는데 본게임(대목 주말) 땐 어쩐다. 일복만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