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상상보다 현실이 훨씬 앞서간다

by 김대일

소설가 한창훈의 작품에 관해 곧잘 썼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계속 끼적일 작정이다. 그만큼 그가 요즘 나에게는 화두다. 집요한 성미가 못 되는데도 홍명희, 신영복, 최일남, 성석제, 김영민 등 몇몇 작가에게 매료되어 물릴 때까지 읽고 또 읽은 적은 있다. 고질이 다시 도진 한창훈이다. 왜 그리도 그가 끌리는지는 틈틈이 차차 씨부리겠다. 우선 그의 에세이에서 나를 발분케 하는 한 대목을 소개하고 내 소회를 밝히는 걸 오늘 게시글로 갈음하겠다.

오래전부터 나는 글 쓰는 이들을 대상으로 강연이나 수업을 할 때 이 이야기를 해왔다. "책상 앞에서의 상상력은 한계가 있다. 내가 상상하는 것은 다른 사람도 충분히 상상한다. 어떤 상상보다 현실이 훨씬 앞서간다. 현실을 찾아서 문을 열고 나가라…."(한창훈, 「공부는 이쯤에서 마치기로 한다」, 한겨레출판, 217쪽)​

<순정>(2016년 개봉, 도경수, 김소현 주연)이라는 영화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소개하던 중 나온 소설가의 영업비밀쯤 되겠다. 거문도 주변 섬사람들에 관한 들었던 내용을 바탕으로 한 실화를 소설가는 시나리오로 썼다. 동네에 몸이 불편한 소녀가 있었는데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업고 다녔다. 그 소녀 이야기로 단편 소설을 만들었지만 아쉬움이 남았다. 죽은 그 소녀가 이야기를 매듭지어 주길 바라는 기분이 들어 시나리오를 쓰게 됐고 영화화하기에 이르렀다고 소설가는 밝혔다.

나는 원래 상상력이 빈약한 사람이다. 썩 창조적이지 못하다는 소리나 다름없다. 글 짓는 짓을 해보겠다고 깝죽대는 사람치고는 참 어이없고 김빠지는 선언이다. 하지만 나는 꾸준히 써제꼈고 아마 나 좋자고 벽에 똥칠할 때까지 쓰고 자빠질 게다. 참신함이나 기발함과는 거리가 먼 맹탕인 주제에 무슨 수로 글을 짓겠다는 건지. 현실에 악착같이 천착하는 것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사는 심정이다. 없는 얘기를 지어내는 건 나처럼 범상한 능력뿐인 사람으로선 분수에 안 맞는 짓임을 잘 안다. 다행스럽게도 주제 파악 진즉에 끝났다는 소리다. 할 수도 없고 하지도 못하는 영역에 뛰어들어 저급함을 더 드러내 그나마 나를 지탱하는 자존감마저 낭비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결국 내가 선택하고 집중하려는 것은 일상이다. 바로 주변에서 벌어지는 언뜻 사소해 보여도 결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비범한 일상을 기록하는 것을 내 글쓰기의 핵심임을 한창훈은 새삼 확인시켜 준다.

'어떤 상상보다 현실이 훨씬 앞서간다'는 대목에서 나는 열광한다. 한번도 겪어보지 않은 상상보다 비록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겪어봄 직한 현실에 사람들은 더 공감하리라 나는 믿는다. 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글 쓰는 이의 경험이 밑바탕에 깔린 글이야말로 오래도록 생명력을 유지하는 비결임을 확신하는 나로서는 리얼리티를 떠받들 수밖에 없다. 그 리얼리티란 원석을 세련되게 가공할 방법에 대한 힌트를 넌지시 건네는 이가 또 한창훈이다.

나이 오십에 만난 한창훈은 내게 큰 행운이다. 젊어서 한창훈을 만났다면 지금같은 큰 울림을 얻진 못했을 게다. 한창훈이 던지는 원초성은 허허로운 지금의 나를 충전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니 나이 따라 확 닿는 사람은 따로 있다. 차차 그에 대해 얘기하겠다. 오늘의 아포리즘은 이거다!

어떤 상상보다 현실이 훨씬 앞서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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