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읽지만 건성건성 읽는 습벽 탓에 기억에 남는 게 별로 없다. 독서에 들인 공에 비해 소출이 크지 않다는 소리겠다. 일전에 분명 읽긴 읽었지만 다시 읽으니 처음 읽듯 전혀 새롭다면 도대체 그때는 뭘 읽었는지 그저 허탈할 뿐이다.
한때 예스러움과 현대성의 경계에 있고, 토착성과 외래성의 경계에 있고, 전원풍과 도회풍의 경계에 있고, 귀족풍과 서민풍의 경계에 있고, 고전미와 유행 감각의 경계에 있는 문장(고종석 평)에 경도되어 고故 최일남 선생 저서를 섭렵한 적이 있었다. 고인의 문체를 자기 몸에 온전히 이식시켜 보겠다는 야심으로 눈에 꽂히는 대로 그게 소설이건 소품이건 아예 통째로 필사하는 열의를 보였지만 깎새 하는 짓이 매일반이라서 이후로 흐지부지되다 몇 년이란 세월만 흘렀다.
아주 우연하게 산문집 『어느 날 문득 손을 바라본다』(현대문학, 2006)를 새삼 꺼내 읽는 중이다. 전에 분명히 통독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이른바 '경계의 문장'과 난생 처음 맞닥뜨린 듯 흥분을 감출 수 없으니 이 어인 조화인가. 예전 열성이 되살아난 것까지는 긍정적일지 모르겠으나 독서력이 얼마나 형편없으면 한때 그토록 사숙했던 선생 문체조차 낯설어하는 이 한심함이란.
아무튼 문장을 어떻게 써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경각심을 새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산문집 속엔 또다른 사숙의 기회가 엿보인다. 이 또한 일전에 읽었을 때는 미처 깨닫지 못한 바라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선생은 챕터 하나를 할애해 이태준의 『문학독본』(이후 『문장강화』로 출간) 설명에 열의를 보인다.
시대가 바뀌고 문체도 엄청 달라지기는 했으나 읽어서 흥미 있고 여전히 공부에 도움을 주는 미덕은 어디가랴 생각했다. 예전과 현대의 서술 기법에 큰 차이를 느끼기 때문에 두 시대를 아우르는 허허실실 문장력 연마가 가능하지 않을까. 이런 유의 참고서로는 이태준의 문학독본을 덮을 것이 없다는 것을 재확인한다.(『어느 날 문득 손을 바라본다』, 91~92쪽)
『문장강화』의 미덕은 좋은 글이란 어떤 것인지 장황하게 해설하지 않는 대신 좋은 글의 본보기로 열거한 120개가 넘는 예문에 있다. 책을 해제解題한 임형택의 설명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 책은 한우충동汗牛充棟으로 쌓인 책더미 속에서 결코 흔히 만나기 어려운 미덕을 지니고 있다. 글은 이렇게 쓰느니라고 논설을 펴기보다는 우리의 눈앞에 좋은 글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보여주는 쪽이다. 동원된 예문이 적절하고 예문의 앞뒤로 들어간 설명 또한 간결하고 명료해서 우리의 머리 속에 쏙쏙 들어온다. 예문의 풍부함은 신문학 20년이 도달한 우수한 성과를 집결해놓았다 할 것이다.(『문장강화』, 창작과비평사, 1988, 4쪽)
몇 해 전 『어느 날 문득 손을 바라본다』를 읽을 무렵 『문장강화』 대목에서 꽂혔던 게 틀림없다. 안 그러면 집 책장 구석에 『문장강화』 중고판이 옹송그리고 있는 게 이상하다. 하지만 사놓고도 깎새는 그 책의 진가를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오래도록 처박아 두고 말았다. 하지만 상봉한 이산가족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이제서야 비로소 토씨 하나까지 머리에 담으려고 무진 애를 쓴다. 여차하면 또 필사하겠다고 염병을 떨 기세다.
이처럼 글이랍시고 끼적대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문장, 문체에 목마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