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를 적마다 까탈을 부리는 영감 손님이 하도 미워서,
"더 잘하는 데 있음 거 가서 깎으이소 마!"
쏘아붙였더니,
"건방지게시리, 씨발."
대뜸 욕설로 돌아오자,
"욕 들어먹으면서까지 깎고 싶은 마음 없어예. 나가이소!"
살짝 기가 눌렸는지 잠깐 소강상태.
"감정이 격해서리 나온 거니 내 실수네. 미안허이. 벌써 앉았는데 나가라 하믄 섭하지."
불현듯 위대한 위선은 반복 훈련이 필요하다는 대목이 떠올랐다. 더 세련되게 꼰대를 휘어잡으려면 미리 녹음기에다 대고 연습을 피나게 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짙게 남았다.
기왕에 이별 통고를 받았다면, 떠나가지 말라고 애원하지 않는 편이 재결합의 가능성을 높인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당신이 '찌질하게' 보여서 헤어지자고 하는데, 거기다 대고 처량하게 매달리면 얼마나 '더 찌질해' 보이겠습니까? 당신이 둔감하다고 여겨서 고민 끝에 헤어지자고 하는데, 그 고민을 헤아리지 못하고 매달리면, 얼마나 더 둔감해 보이겠습니까? 매달리지 마십시오. 헤어지자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래, 헤어져"라고 대답하고 두말도 하지 말고 돌아서 나오십시오. 그리고 절대 먼저 연락하지 마십시오. 어디 동굴 같은 데 들어가 마늘즙과 쑥즙을 먹으며 버티다 보면, 헤어지자던 여자친구가 다시 연락해올지 모릅니다.
하지만 자기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냉큼 돌아 나오기가 어디 쉬운가요? 눈물 콧물 타액 식은땀 등 얼굴의 각 구멍에서 액체란 액체는 다 흘러나올 지경일 겁니다. 이별 통고를 받자마자, 제발 돌아와 달라고 간청하고 싶을 겁니다. 바로 이때! 위선이 필요합니다. 안 그런 척하는 겁니다. 태연한 듯 "그래, 헤어져"라고 또박또박 말하고, 미사를 마치고 떠나는 신부처럼 의연히 돌아 나오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위대한 위선을 해낼 수 있을까요? 반복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제 우리 그만 헤어져"라는 말을 녹음한 뒤, 매일 아침 들으며 "그래, 헤어져"라고 반응하는 연습을 반복하는 겁니다. 마치 종소리만 들으면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될 때까지 반복합니다. 그리하여 이별 예식에 숙달되면, 헤어지자는 말만 들어도, 자동적으로 입에서는 "그래 , 헤어져"라는 말이 튀어나오고, 몸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게 될 겁니다. 누가 악수하자고 손을 내밀면 자동으로 손을 맞잡게 되는 것처럼. "우리 이만 헤어져." "그래, 헤어져." 이어지는 문 닫는 소리, 쾅. 이러한 이별의 예식은 재결합의 가능성을 높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에 여자친구는 의아해하게 됩니다. 아, 내 상황 파악이 틀렸던 게 아닐까, 이 친구에게 내가 모르는 면이 있었구나 등등.
코미디언 그라우초 마크스는 말한 적이 있죠. 나를 받아주는 클럽 따위에는 가입하고 싶지 않다고. 늘 자기를 받아주던 남자라서 소중한 줄 몰랐고, 그래서 선뜻 헤어지자고 말했으나, 막상 자기에게 매달리지 않는 모습을 보니, 헤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스멀스멀 드는 겁니다. 그러다 뾰족한 대안이 생기지 않으면, 다시 연락이 올지도 모르는 거죠. 끝내 연락이 안 오면 어떡하냐고요? 그거야 제 알 바 아니죠. 적어도 안전 이별은 이루어진 것 아닌가요?(김영민,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사회평론, 130~132쪽)
결국 못 이기는 척 깎아줬고 그 이후로 영감이 점방을 찾으면 깎새한테 깍듯하게 대하는 건 물론이고 심기까지 살핀다. 깎새는 깎새대로 안 부딪히려고 발톱을 숨기지만 노련미가 영 떨어져 대번에 표가 난다. 역시 위대한 위선에는 반복 훈련이 필요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