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회화가 필요해

by 김대일

작년까지만 해도 깎새네 점방에 동남아시아나 '~스탄'으로 끝나는 나라 이방인들만 드나들었던 건 아니었다. 어디서 소문 듣고 왔는지 허여멀건 면상을 한 멀대 백인이 불쑥 찾아왔을 정도였으니까.

- 머리 깎아요?

어눌한 한국어로 물어보는 상대에다 대고 깎새는 혹시 몰라 짧은 영어로 주의부터 줬다.

- no card, only cash!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 ATM?

이번에는 깎새가 알아듣고 손짓발짓 해가며,

- 옆에 편의점, 편의점.

- 감사합니다.

넙죽 절하고는 나가 버렸다. 그러고 몇 분 지나 다시 등장한 백인 청년.

- 얼마예요?

- (오른손을 들어 쫙 펴서) 5천 원, five thousand won. 싸다, 싸!"

값부터 치른 백인 청년 이발의자에 앉자마자 스마트폰을 들어 열심히 뭔가를 검색하려다 인터넷이 안 되는지,

- 와이파이 안 돼요, 내 거.

반지빠른 깎새가 제 스마트폰을 가져와 검색창을 띄워 건넸더니 'short men's spiky'를 입력해 주는 게 아닌가. 짧은 스포츠형 비스무리한 이미지가 뜨자 '바로 그거!'라는 듯 활짝 웃어 보였다. 깎새가 노파심에,

- 똑같게는 못해요. similar, similar, OK?

백인 청년이 엄지와 검지를 둥그렇게 모으는 게 OK란다. 서두에서 밝혔지만 베트남, 필리핀, '-스탄' 붙은 나라 사람은 간간이 접했어도 허여멀건 백인은 처음이라 호기심이 발동해 손 대신 입 놀리느라 바쁜 깎새였다.

- Where are you from?

- 영국에서 왔어요. 아빠 미국사람, 엄마 영국사람. 하지만 북아일랜드에서 살았어요. 북아일랜드 알아요?

아는 체는 해야겠는데 아는 건 별로 없고 영어는 짧아서 난처해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일단 내뱉었다.

- 알지, 알지. 기네스 맥주. 카악, 죽이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백인 특유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 ya, ya. 하지만 거긴 아일랜드. 나는 북아일랜드. 타이타닉. You know?

타이타닉 배를 북아일랜드 조선소에서 건조했다는 토막 상식을 주워들은 적이 있어 금세 알아 먹었다. 대기석에 앉은 다른 손님이 느긋해 보여서 내친 김에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한국에 무슨 일로 왔냐고 물어보려는데 문장은커녕 단어도 생각이 안 나서,

- you, what person?

되도 않게 물었는데도 찰떡같이 알아들어,

- 나, 영어강사.

대답이 돌아왔다.

- 5년 전 한국 왔어요. 천안, 나사렛대학교 교수. 하지만 지금 부산 왔어요. 부암동. 영어학원 강사. ○○○영어학원(부근에 있나 본데 처음 듣는 상호라 금세 까먹은 깎새).

- How old are you?

- 나, 31살.

- married?

- 나, 혼자 살아요. 솔로.

깎새가 앞거울에 비친 자기를 가리키면서,

- me?(나는 몇 살로 보이냐?, 말 잘 해라.)

모르겠는지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서,

- (작년이었으니까) I'm fifty two.

- What?

놀라는 눈치였다. 보기보다 겉늙어서 놀란 건지 동안이라서 놀란 건지 분간이 안 갔지만.

- I'm baby-face.

깎새가 제풀에 잔망을 떨자 파안대소하는 백인 청년.

말끝마다 '하지만'을 붙이는 말버릇이 유난스러우면서 끝끝내 한국말을 쓰려고 애쓰는 모습이 기특했다. 손짓발짓 다 섞어서라도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대기석 손님이 늘자 마음이 급해져서 말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작업을 끝낸 머리를 가리키면서,

- How?(어뗘?)

- 좋아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줬다. 다음에 또 들르라는 작별인사가 안 떠올라서,

- See you later.

손 흔드니까,

- 또 봐.

반말인데도 듣기 싫지 않더라.

목마른 놈이 우물 파는 격으로 제 발로 한국에 찾아왔으면 한국말로 의사소통해야 한다는 게 깎새의 돼먹잖은 기조였지만 현실은 그게 아닌 기라. 머리를 깎겠다고 찾아오는 이방인이 한국말에 영 젬병이면 손짓발짓에다 안 되는 영어를 콩글리쉬로 섞어야 겨우 말이 통하고 장사 해먹기 편한 법이다.

같은 동족임에도 생면부지인 한국사람을 직면할 때 보이지 않는 단단한 벽을 가끔 느낀다. 그러면 혹시 허점이라도 잡힐까 봐 경계심이 발동하지. 하지만 이역만리 타국살이에 지친 이방인을 대할 땐 좀 다르다. 가뜩이나 외로운 데다 향수병에 젖은 이에게 설령 보잘것없을지언정 친절이라는 걸 살짝 비추기만 해도 팽팽했던 긴장감은 삽시간에 풀린다. 그렇게 이완된 이방인이 풀어내는 경험담은 한국인이 아니라서 무척 이국적이고 유난스럽다. 무엇보다 타국살이하며 겪은 애환은 한국을 떠나 살아본 적 없는 깎새로서는 대단한 문화적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요는 말하고 싶어 미치겠는 이가 풀어낼 넋두리를 제대로 알아듣자니 기본적인 영어 회화쯤 장착하는 게 우선인 줄은 알겠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선풍적 인기 덕에 나라 밖 외국인들은 한국말 배우겠다고 난리인데 깎새만 혼자 뒷북치고 앉았는 게 어째 좀 꼴사납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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