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부친을 잃은 천붕지통을 겪었던 후배가 점방을 찾아왔었다. 명절 앞에 목욕재계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조문을 와 준 고마움을 보답하려는 차원이 더 컸다.
공교롭게도 깎새가 뒤웅박 신세를 못 면하던 무렵 후배 녀석도 한창 고전 중이었다. 둘 다 돈 문제가 컸고 그로 인해 가정사에 짙은 어둠이 드리워졌던 것도 비슷했다. 동병상련끼리 가끔 만나 소주잔을 기울였었는데 넘어가는 술맛이 유난히 썼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도 비슷한 처지끼리 의지가지할 수 있었던 덕분에 어려운 시기를 넘기는 데 서로 일조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다 녀석이 홀연 자취를 감췄다. 근근이 중심을 잡던 녀석에게 일신상의 변화라도 생겼는지 걱정이 앞섰다. 7~8년 전으로 기억하는데 동네 부근을 지나다가 도로 포장이 한창인 공사 현장에서 작업복을 입고 있던 후배를 우연히 발견해 혹시 몰라 전화를 걸어 그 인부가 후배인지 물었었다. 맞다면서 노가다로 전향한 지 꽤 됐다고 거침없이 대꾸했다. 그 이후 또 한참이 흘러 상주와 문상객으로 만나 서로의 안부를 나누면서 도시공사가 발주하는 보수 공사의 3할 이상을 맡은 건설회사에서 보수 후 도로 포장을 담당하는 중간 간부로 자리매김했다는 근황에 깎새는 내 일처럼 기뻐했다.
전후 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절치부심이라는 성어로밖에는 설명하기 힘든 그의 재기를 목도하면서 본전 생각이 간절하듯 지난했던 지난 시절이 아깝기는 해도 남아 있는 앞날이나마 창창하고 행복하길 진심으로 기원했다. 그러다가 깜냥도 아니 되면서 동양철학의 총아라는 주역 64괘 중 마지막 괘인 화수미제의 괘사가 불현듯 떠올랐고 후배를 다음에 또 만나게 된다면 고故 신영복 교수가 그 괘를 해설한 대목을 꼭 알려 주고 싶어졌다.
'어린 여우가 강을 거의 다 건넜을 즈음 그 꼬리를 적신다'라는 괘사에 기대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반성이며, 새로운 출발이며, 가능성이며,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완성이 보편적 상황이라면 완성이나 달성이란 개념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완성이나 목표가 관념적인 것이라면 남는 것은 결국 과정이며 과정의 연속일 뿐입니다'라고 설파한 대목은 비단 후배뿐 아니라 깎새 자신에게도 의미심장한 성찰의 계기로 삼기에 충분하니까.
화수미제火水未濟
<괘사>
未濟亨 小狐汔濟 濡其尾 无攸利
미제괘는 형통하다. 어린 여우가 강을 거의 다 건넜을 즈음 그 꼬리를 적신다. 이로울 바가 없다.
<단전>
彖曰 未濟亨 柔得中也 小狐汔濟 未出中也
濡其尾 无攸利 不續終也 雖不當位 剛柔應也
미제괘가 형통하다고 하는 까닭은 음효가 중中(제5효)에 있기 때문이다. 어린 여우가 강을 거의 다 건넜다 함은 아직 강 가운데로부터 나오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그 꼬리를 적시고 이로울 바가 없다고 한 까닭은 끝마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모든 효가 득위하지 못하였으나 음양 상응을 이루고 있다.
<상전>
象曰 火在水上 未濟 君子以 愼辨物居方
불이 물 위에 있는 형상이다. 다 타지 못한다. 군자는 이 괘를 보고 사물을 신중하게 분별하고 그 거처할 곳을 정해야 한다.
최후의 괘가 완성 괘가 아니라 미완성 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깊은 뜻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변화와 모든 운동의 완성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연과 역사와 삶의 궁극적 완성이란 무엇이며 그러한 완성태完成態가 과연 존재하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태백산 줄기를 흘러내린 물이 남한강과 북한강으로 나뉘어 흐르다가 다시 만나 굽이굽이 흐르는 한강은 무엇을 완성하기 위하여 서해로 흘러드는지, 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무엇을 완성하려고 바람 서리 견디며 서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실패로 끝나는 미완성과 실패가 없는 완성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보편적 상황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반성이며, 새로운 출발이며, 가능성이며,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완성이 보편적 상황이라면 완성이나 달성이란 개념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완성이나 목표가 관념적인 것이라면 남는 것은 결국 과정이며 과정의 연속일 뿐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만연한 ‘속도’의 개념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속도와 효율성, 이것은 자연의 원리가 아닙니다. 한마디로 자본의 논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도로의 속성을 반성하고 ‘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로는 고속일수록 좋습니다. 오로지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도로의 개념입니다. 짧을수록 좋고, 궁극적으로는 제로(0)가 되면 자기 목적성에 최적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순입니다. ‘길’은 도로와 다릅니다. 길은 길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길은 코스모스를 만나는 곳이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나란히 걷는 동반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일터이기도 하고, 자기 발견의 계기이기도 하고, 자기를 남기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내가 붓글씨로 즐겨 쓰는 구절을 소개하지요.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은 서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선盡善하지 않으면 진미盡美할 수 없고 진미하지 않고 진선할 수 없는 법입니다. 목적과 수단은 통일되어 있습니다. 목적은 높은 단계의 수단이며 수단은 낮은 단계의 목적입니다.
나는 이 미제괘에서 우리들의 삶과 사회의 메커니즘을 다시 생각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바쁘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노동이 노동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될 뿐 아니라 생산 과정에서 소외되어 있는 현실을 생각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면 우리는 생산물의 분배에 주목하기보다는 생산 과정 그 자체를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는 과제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신영복, 「강의」, 돌베개, 125~1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