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성

by 김대일

역사문화학자 요한 하위징아가 쓴 역작 『호모 루덴스』를 쉽게 풀어 쓴 노명우의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을 꿈꾸다』(사계절, 2011)에는 서로 대척점에 서 있는 두 인간형이 등장한다. '호모 루덴스'와 '호모 파베르'. '호모 루덴스'가 놀이하는 인간, 즉 놀고 즐기는 존재라고 읽히는 반면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인간의 본질이 도구를 사용하고 제작할 줄 아는 데 있다고 표방하고 도구의 인간 또는 만드는 인간, 즉 '호모 파베르'로 명명했다.

'호모 파베르'가 투자 대비 최대 효용, 합리적인 방식으로 유용한 것을 만들어 내고 혁신을 이끌어 문명을 발달시킨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세상에나 최적화된 산초 판사형이라면, '호모 루덴스'는 당장 시급하지 않은 재미와 명예를 위한 욕구, 즉 놀이로 대변되는 다양한 정신적 창조 활동을 추구한 덕분에 인류 문명 발전에 기여했다고 보는 똘끼 충만한 돈키호테형이라면 적절한 비유가 될까.

대립하는 두 인간형 사이에서 극단적인 한 면만을 드러내지 못하고 드러낼 수도 없는 현실이다. '호모 파베르'로 사는 삶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영위할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상이긴 하지만 서브컬쳐가 정통 문화를 지배하는 역전 현상을 야기시키는 일명 오타쿠(덕후)들의 행태를 과연 합리성과 유용성만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가 하면 그 대답이 몹시 궁색해지는 게 사실이니까. 오로지 창조적 재미를 추구한 끝에 성공에 이른 이들은 또 어떻게 규정지을 것인가.

어제 것과 다른 무엇을 매일매일 끼적이려 드는 깎새 입장에서는 턱밑까지 찬 한계에 직면한 자신의 무능을 자책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창의적인 무언가를 계속 갈구하려 드는 모순성 때문에 매일매일이 괴롭다. 한때 국내 최대 규모라는 서울 삼성동 대형 전광판에다 실물같은 파도를 전시했고, 뉴욕 타임스퀘어에 대형폭포와 물고래를 등장시켜 전세계 이목을 집중시키는 성공을 거뒀던 회사가 있다. 그 성공 이면에 회사 대표가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을 받아 밀린 직원들 월급을 줄 정도로 어려웠던 시절을 겪었고 그럼에도 오로지 이 난관을 헤쳐 나가기 위한 임직원들의 필사적인 노력과 끈끈한 동료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미담이 훈훈했던 회사 말이다. 그 회사의 창업주가 세상을 떠나기 전 남겼다는 유언은 차라리 비장하기까지 하다.



크리에이티브한 집단이 비즈니스적으로도 성공하는 회사를 만들고 싶다.(고故 최은석 대표)



창의성은 과연 어디에서 기인하고 어떻게 개발시키는지, 그렇게 쓸모 있게 다듬은 창의성을 일상에 접목시키면 어떤 반향이 일어나는지, 하여 내가 노는 사람인지 일하는 사람인지 나누기보다 일하면서 즐기고 즐기면서 일하는 모티브를 찾는 데 골몰하는 깎새다. 크리에이티브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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