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란 드라마에 꽂혔었다. 드라마가 내세웠다는 '좋은 어른이란 무엇인가'라는 담론은 너무 거창해서 깎새가 거들먹거릴 계제가 아니다. 그저 '지금-여기' 존재하는 제 모습과 통하는 구석이 있다는 일체감에 가슴 먹먹했을 뿐. 게다가 일정 지분을 차지하는 대사가 드라마를 먹여 살린 측면이 강하다. 고상하고 철학적인 수사를 궂이 동원하지 않고 일상어만으로도 도대체 사는 게 뭔지를 줄기차게 곱씹게 만드는 대사는 그야말로 주옥같다. 16부작 드라마를 수놓은 명대사의 향연에서도 유독 깎새 귀에 쏙 박힌 대사를 꼽자면 이거다.
백수인 상훈(박호산 분)과 기훈(송새벽 분) 형제가 청소업체를 개업하면서 고사를 지내는 장면. 후계동 조기축구회 회원이자 절친인 제철(박수영 분)이 덕담이랍시고 형제의 어머니(고두심 분)에게 뇌까리는 대목.
- 오십 넘으면 다들 이러고 살아요 어머니. 자동차회사 다니던 진범이 지금 미꾸라지 수입해요. 은행 부행장하던 권식이는 모텔에 수건 대고. 공부해서 다니는 직장 끽해야 20년이예요. 백수 인생에 한 직업으로 살기 지루하죠. 서너 개 해봐야 지루하지 않고 좋죠.
드라마 배경처럼 등장하는 후계동 조기축구회 회원들은 모두 구김살이 없다. 현재 삶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내세울 것 없는 처지임에도 하나같이 오지랖만 넓어가지고 남을 배려하는 데 열성이다. 지안(이지은 분)의 할머니 장례식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상훈, 기훈, 제철, 진범, 권식 등으로 명명되는 후계동 조기 축구회원들이 드라마 설정 상 자칫 전형적으로 비춰질 수 있음에도 리얼리티로 똘똘 뭉친 입체적 인물들로 다가오는 까닭은 어쩌면 그 지루하지 않게 살아온 전력을 깎새가 거쳐왔기 때문은 아닐는지. 나름 금융회사 화이트칼라로 지내다 그만두고 낙향한 뒤 뒤웅박 신세로 전락해 급기야 빚더미에 나앉은 백수로, 파리만 날리던 부산 작은 포구 포장마차 주인으로, 지자체 9개월짜리 공공일자리를 전전하던 직업상담사로, 지금은 깎새로. 가족들이야 죽을 맛일갑세 당사자는 롤러코스트를 탄 듯 지루할 새가 없었던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지루하지 않게 산 덕분에 맷집 하나는 제법 두둑해진 폭이다.
'공부해서 다니는 직장 끽해야 20년'이란 대사는 많은 걸 품는다. 자기 분야에서 승승장구해 꽃길을 걷는 이들은 훌륭하다. 그들은 투철한 직업적 소명의식으로 치열하게 살았고 그로 인해 얻은 값진 성취는 상찬받아 마땅하다. 그렇지만 끽해야 20년 뒤, 예를 들어 나이 서른에 성공 가도에 올라서 20년 뒤인 쉰이라는 깔딱고개에 맞닥뜨렸을 무렵 그간 끼어 있던 영광이란 거품을 쏙 뺀 가장 담백한 상태로 후반생이라는 새로운 도화지에다가 지루하지 않을 미래를 데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건, '지루하지 않을'에 방점을 찍을 것. 후계동 조기축구회 회원들이 <정희네> 선술집에 모여 '후계! 후계! 후계! 잔을 비우게!'를 외치며 고단했던 하루를 구김살 없이 마감할 수 있는 원동력을 탐구하면 지루하지 않을 미래상이 엿보일지 몰라 요즘도 가끔 그 장면만 골라 돌리고 또 돌려 본다.
연기자로 승승장구하며 성공 가도를 달리는 중이었고 앞으로 작업해야 할 작품이 줄줄이 대기하던 와중에 불의의 객이 된 주인공 배우의 마지막은 너무 안타깝다.
- 인생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세면 버티는 거야.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겠지만 버텼으면 어땠을까. 팬심은 여전히 속상하고 한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