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태풍상사> 배경은 IMF 시절이다. 그 시절이 암울했을지언정 20대 중반이던 깎새가 자의든 타의든 만약 그때 단호하게 다른 결단을 내렸다면 인생 역정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그 향방이 궁금하긴 하다. 역사에 만약은 없듯 돌이켜 후회한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헛짓거리일 뿐이지만.
ROTC 장교로 전역하자마자 1997년 7월 중견 생명보험회사에 입사했다. 하지만 곧바로 IMF 유탄을 맞았다. 본사 소속 기업 영업부서로 발령받은 입사 동기는 대여섯 명쯤 됐다. 대기업이 도산하는 판에 금융사가 무사할 리 없어서 회사 내부적으로 대대적인 인원 감축이 감행될 거란 불길한 소식이 솔솔 들리던 와중에 관리팀장이란 자가 부서 내 신입사원들을 모두 건물 옥상에 집합시켰다. 그러고는 동기들끼리 제비뽑기를 해 퇴사자 몇 명을 추리라는 살풍경을 연출했다.
고인 물 자리 보전하려고 입사한 지 몇 달 안 되는 신입사원을 쫓아내려는 회사 수뇌부 꼼수를 비난하기보다는 서울 입성 몇 달만에 퇴사라는 불명예를 안고 낙향해야 하는 게 더 난처해서 무조건 살아남고 봐야 한다는 오기를 부렸던 게 생생하다. 허나 그때 국면에서 무조건적이라고 여겼던 판단이 과연 정답이었냐고 돌이켜 자문하면, 글쎄올시다. 제비뽑기에 걸려 퇴사자로 결정되었다면 그길로 고향 부산으로 내려갔을 게다. 어수선한 시국에 뭘로 벌어먹을지 막막했겠지만 한편으로는 룸펜을 빙자해서 군생활 이후 줄곧 팽팽하게 긴장했던 심신을 이완시키며 숨 고르기에 집중했을지 모른다. 그러면서 앞으로 펼쳐질 인생 역정에 대비해 보다 진지하게 숙고하는 시간을 가졌을 테지.
같은 과 남자 동기들이 밟았던 길을 따라가는 게 아마 제일 무난한 대안이라 여겼을지 모른다. 교육대학원을 진학해 국어교사 임용시험을 준비했겠지. 군 시절 쟁여둔 목돈은 학비 보태느라 바닥을 드러냈을 테니 아르바이트하면서 딴에는 바쁘게 지냈을 게다. 요행히 시험에 붙어 정교사가 되었다면 같은 정교사 여자와 결혼해 남들 부러워하는 부부 교사로 평탄하게 인생을 구가했겠지. 하지만 아무나 합격하는 임용이 아니니 떨어졌을 공산이 더 크다. 그럼 부평초마냥 이 학교 저 학교를 전전하다 혼기까지 놓친 기간제 교사로 덧없이 낫살만 먹은 볼썽사나운 홀아비로 전락하지 말란 법 없다.
근데 깎새 기질로 봐서는 이러거나 저러거나 어째 밋밋하다. 오히려 돼지목에 진주목걸이처럼 영 꼴같잖아 민망스럽다는 표현이 적확하다. 교사 직업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예컨대 훌륭한 품성, 투철한 사명감, 모범적 태도, 학생에 대한 애정 따위를 깎새와 겹치면 들어맞는 구석이 하나도 없어서 교단에서 호령했다손 과연 교사로서 평탄했을지는 미심쩍다. 기복이 심하고 싫증을 잘 내는 성정이 투철한 사명감을 미덕으로 삼는 직업에 어울릴 리 없고 가장 치명적으로 미성년이라는 존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사다 쓰는 물건이 아니면 애정이랄 게 갑자기 생길 리 만무하다. 그저 생계 방편쯤으로 치부하며 먹고 사는 데야 지장이 없었을망정 사는 재미랄 것도 없이 꾸역꾸역 버텼을지 모를 일이다.
세상에는 교사 말고도 직업이 지천에 깔렸으니 꼭 펜대나 끄적이며 고상한 척 지냈을 거란 보장이 없다.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니 남의 등 처먹는 사기꾼이 되어 있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IMF의 한가운데에서 허우적댈 무렵 그때 내린 결정이 옳았느냐고 하면 과연 그렇다고 바로 응수하기가 망설여진다. 결국 제비뽑기에서 살아남아 자리를 보전했고 그 덕분에 회사 동료인 마누라와 결혼해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두 딸을 낳아 지금에 이르긴 했지만.
과거지사를 떠올리면 당치도 않은 '만약에'가 자매품처럼 따라오는 까닭이 혹시 IMF가 할퀴고 간 생채기가 여전히 아물지 않아서 그 시절과 단절하지 못해서이지 않을까. 슬픈 자화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