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말 말고

by 김대일

퇴근해서 아파트 지상 주차장에 차를 대려는데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센 초로의 여자가 차를 막고 서서는 창문 내리라는 시늉을 했다.

- 전면주차 하지 마세요.

뚱딴지같은 명령조라 일단 빈정부터 상했다. 그런데 깎새 차 바로 앞 비상등을 켠 트럭에서 한 남자가 내리더니 그 여자와 실랑이를 벌였다. 전면주차 때문인 성싶었다. 분이 안 풀려 투덜대던 남자가 트럭을 몰아 다른 곳에다 주차를 했고, 의기양양해진 여자가 다시 깎새 차로 들이닥쳤다.

- 이 아파트에 사시는 분이세요?

깎새가 물었다.

- 107동 살아요.

깎새와 같은 동이다.

- 전면주차하는 자동차가 뿜어대는 배기가스 때문에 당최 살 수가 없어요.

- 몇 층 사시는데요?

- 14층.

- (이 여자 정체가 뭔가 싶어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매연이 14층에서도 맡아져요?

- 잔말 말고 전면주차 하지 마세요!

깎새도 후면주차를 생활화하자고 관리사무소까지 가서 항의한 적이 있었다. <전면주차! 매연은 싫어요>라는 주의 팻말을 심심해서 걸어놓은 게 아니니까. 아파트 지상 주차장에 면한 꽃밭에는 나무와 풀, 벌레, 고양이, 새들이 터 잡고 있는데다 1~2층 거주차들도 그 지상 세계와 공존하는 처지다. 엄연히 존중받아야 할 생명체들이 매연이라는 오염 물질로부터 스트레스를 덜 받으면서 상생하기 위한 최소한의 배려를 묵살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아파트 관리소장 대꾸 한 마디에 넉아웃되고 말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 요즘 차들은 좋아져서 배기가스가 그리 심하게 안 나와요. 게다가 전면주차하는 차들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계도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요.

아파트 관리소장의 능글거리는 입심에 굴복당한 이후로 전면주차를 심심찮게 해대면서 스스로 공범으로 전락하고 만 깎새인지라 기를 쓰고 말리는 14층 여자를 무시하면서까지 전면주차할 보짱이 없어서 슬그머니 다른 데에다 차를 대긴 했다.

헌데 영 뒷맛이 개운치가 않았다. 14층 여자 나가도 너무 나간 경향이 있어서였다. 아파트 관리소장에 의하면 성능 좋은 차들로 즐비한 주차장이니 필경 죽을 만큼 매연이 배출될 턱이 없다. 설령 매연이 공기를 혼탁하게 만든다 해도 14층만 콕 찍어 그 여자 호흡기를 괴롭힐 리 없다. 만약 매연이 층수에 구애받지 않고 지독할 양이면 14층이 됐건 깎새가 사는 20층이 됐건 피해 상황은 균질할 게다. 그럼 해당 아파트 동이 발칵 뒤집어질 테고 대책을 마련하라며 입주민들이 관리 사무소 앞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항의 시위할 건 불 보듯 뻔한데, 머리에 띠 두른 사람은 없고 전면주차한 차들밖에 보이지 않으니 어인 일인가. 유독 14층 여자만 밤낮 없이, 사시사철 마스크를 끼고 살아야 겨우 부지할 수 있다는 우는 소리와 전면주차한 차들이 내뿜는 배기가스 사이에 상관성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까닭이겠다.

게다가 이왕 전면주차 반대를 천명할 양이면 차라리 애써 가꾼 꽃밭이 상한다느니 1~2층 주민들 건강도 걱정해 달라는 식의 논리로 맞서야 그나마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으련만, 으르렁대면서 '잔말 말고 내 말 따르라'고 하니 빈약한 논리는 차치하고라도 횡포도 그런 횡포가 없는 것이다. '잔말 말고 따르라'가 '나만 아니면 돼!'로 자꾸 들려 깎새는 영 못마땅했다. 해서 관리사무소를 찾아가 정식으로 항의할 작정이다. 전면주차를 전면 허용하라고는 차마 못 하겠고 14층 여자 입단속이나 해 달라는 항의지만 실은 그 또한 어불성설이다. 입주민 입을 관리사무소가 입틀막한다는 건 당치도 않으니까. 결국 퇴근할 적마다 14층 여자가 있나 없나 확인한 다음에 주차하는 수밖에 없다는 얘긴데, 점방에서는 손님 눈치, 퇴근하면 14층 여자 눈치, 어딜 가나 남 눈치나 살펴야 하는 깎새 신세다. 참 가련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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