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누스적 사고

by 김대일

깎새 점방과는 무관해 보이는 묘령의 여인이 간간이 출몰하곤 한다. 그러면 깎새는 상대가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으리라는 걸 경험적으로 직감하면서도 일단 경계모드로 돌입한다. 이발의자에 앉아 있는 손님이 스타일 까다롭기로 악명이 높아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 깎새 심정이야 남 일이건 말건, 종교가 인간에게 끼치는 선한 영향력을 모르는 바 아니나 계율이니 계명 따위에 매여 사는 건 때려죽여도 싫어서 깎새가 무신론자임을 자처하건 말건 복음이라는 미명하에 맹신하는 종교를 전도하려 드는 그 알량한 '좋은 말씀' 때문에 속 시끄러웠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깎새를 알아서 수세적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여자는 그쪽 부류는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발하느라 여념이 없는 와중에 점방 문을 스윽 열고 들어오길래 이발의자 앉은 손님 일행인 줄 알았다. 헌데 쭈뼛쭈뼛하는 게 꼭 아쉬운 소리를 입에서 떼려는 품이었다. 뭐 하자는 수작인지 의심 섞인 눈길로 바라보는데 대뜸, "일하고 싶은데, 자꾸 떨어져요" 한숨 탓에 땅 꺼질 뻔했다.

느닷없어 뜨악하던 차에 여자가 품고 있는 책 한 권이 무척 낯이 익었다. 이용사 필기시험 이론서였다. 국가공인 자격증이 다 그렇듯 이용사 길로 투신하기로 마음먹으면 맞닥뜨리는 첫 관문은 필기시험. 딱 한 권으로 2주만 투자하면 이론부터 문제까지 도통해 합격은 식은 죽 먹기라는 꾐에 속아 넘어가 샀던, 개정판이 나와도 여러 수십 번 나왔을 법하지만 구판이든 신판이든 표지가 똑같아 출판사의 성실성을 의심케 하는 바로 그 책을 전가의 보물인 양 귀하게 품은 여자는 원장 성별 따윈 관심사가 전혀 아니라는 듯, 동네 살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커트점이면 만사 오케이라는 듯 얼굴부터 무턱대고 들이밀어서는 업계 선배로부터 비법이 될 만한 거면 그게 뭐든 전수받겠다는 애원 모드로 깎새와 마주서 있었던 것이다.

필기시험만 세 번 떨어졌다나. 책을, 아니 책만 열심히 팠지만 거기서 출제되는 문제가 별로 없었다고 했다. 당연하지. 그 책으로 공부한 깎새도 한두 문제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었으니까. 기본적인 이론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디서 그런 것만 용케 모아 놓았다 싶을 만치 난이도 운운하면 입 아플 기출문제로 도배가 된 책은 그야말로 허접한 입문서 그뿐이라서 그걸 통째로 삶아 잡수셨다 한들 큰코다치기 십상이다. 국가시험이 결코 호락호락한 게 아니니까. 근방에 살아서 오며가며 들를 기회를 엿보았단다. 보아하니 원장이 팔팔해서 기적의 한 수쯤 전수해 줄 것만 같았다나. 하루라도 빨리 자격증을 따 일하고 싶은데 필기에서 계속 발목이 잡혀 마음고생이 자심하다면서. 간절한 건 알겠는데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요행히 필기는 한 번에 붙었지만 장장 1년 2개월, 4전5기만에 실기시험을 겨우 통과한 처지라 동병상련이 일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다. 홀아비 사정 과부가 알아준다면 과부 사정을 홀아비가 모를 리 없다. 그렇다고 해서 깎새가 당장 해줄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필기시험에서 빈도수 잦은 문제가 이런저런요런 거라고 훈수를 두는 짓은 앞에서 밝힌 바대로 한두 문제 잘 찍어 요행히 필기시험 합격한 사람이 말할 바가 못 된다. 실기야 어차피 돈을 투자해 정식 학원에 들어가 전담 강사한테 전문적이고 집중적으로 배워야 합격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이 또한 논의할 계제가 아니다. 하여 깎새 선에서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이란 깎새로 거듭나기까지 겪었던 파편적인 경험이나 주워섬기는 것뿐이지만 이런 식의 산경험은 당장 시험 당락에 눈이 돌아간 이에게는 소 귀에 경 읽기라서 무의미한 수작이다. 그러니 앵무새마냥 열심히 하시라는 격려만 되뇔 뿐.

거창한 뭔가를 기대하고 점방에 들어왔건만 실하게 건질 게 없다고 여겼는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여자. 종종 들르겠다며 점방 문을 막 나서려다가,


"다른 사람 쓰지 말고 저 꼭 쓰세요. 월급 싸게 받으께요. 네?"


자고로 일을 갖추려면 선후가 있는 법이다. 그런 제안은 자격증 딴 뒤에나 할 소리라 얼토당토않다. 게다가 일꾼은 고용인이 판단하는 거지 자기를 뽑아 달라고 요청하는 사람이 아니다. 막무가내로 들이대기보다 장래성을 어필하는 게 더 신상에 이롭다. 뭣보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깎새 스타일이 아니다.


"필기시험 합격할 궁리부터 하십시오."


미지의 영역에 담대하게 임하려는 태도는 가상할지언정 세상 만만한 게 없다는 경각심까지 장착하는 야누스적 사고가 필요할 만큼 여자는 너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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