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숫집 이모

by 김대일

대봉을 안 먹는 깎새다. 감은 먹지만서도 대봉 특유의 물컹물컹한 식감이 영 맘에 안 드는 데다 먹고 난 즉시 변비기로 꽉 막힌 듯한 더러운 기분이 싫어서 공짜로 박스째 갖다 줘도 안 먹는 대봉이다. 엊그제 부친 가게에서 일하는 김 군이 알이 굵은 대봉 두 알을 선심 쓰듯 줬다. 성의를 봐서 받긴 받았는데 안 먹으니 별수없다. 버릴 수밖에. 도로 가져가면 될 일인데 그건 또 싫었던 김 군이 잔머리를 굴렸다.


- 정 못 먹겠으면 옆 카센터 아저씨 주든지.


두 알이니까 한 알은 카센터 가서 생색을 냈고 나머지 한 알은 점방 문 열기를 기다렸다가 옆 국숫집 이모 줬다. 요즘 장사가 잘 돼 그런가 인심이 후해졌다면서 후덕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국숫집 이모. 대봉은 안 먹어서 준 거고 상추니 고구마 따위는 깎새 점방하고 안 어울려도 국수집 이모한테는 요긴한 성싶어 근자에 생기는 대로 건네줬다는 덧말까지 미주알고주알 풀 까닭이 없어서 말았다. 그러니 없던 인심이 갑자기 샘솟아서 안 하던 짓 하는 게 아니다. 똑같은 소리 또 되뇌이지만, 먹는 장삿집에 줘야 그나마 표가 나서 준 것뿐이다.

아무리 벽 사이로 마주보긴 해도 이모 파는 국수 솔직히 별로다. 드나드는 손님 중에 옆 국숫집 맛있냐고 물어오면 즉답을 피하고 우물쭈물거리기 일쑤다. 묻는 말에 대답은 해야겠기에 "이웃인데 별로라고 말은 못하잖아요" 겨우 눙칠 뿐이다. 딱 한번 거기서 국수와 김밥을 먹었었다. 허섭스레기 입맛인데도 불구하고 영 마뜩잖은 맛이었다. 음식 맛만큼이나 점방 분위기도 밋밋하기 짝이 없다. 한 자리에서 국수집을 10년 가까이 해먹으면 그동안 묵은 사연이 곳곳에 배어 있어 낭만이랄지 연륜이 묻어나야 할 테지만 목청 크고 수다스러운 이모를 닮아 값없고 휑하기만 하다. 하여 먹는 재미랄 게 없이 허기만 때우다 마는 바라 같은 값이면 거기 음식을 안 사 먹는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으로 요상타. 10년까지는 아니더라도 깎새도 어느덧 한 자리에서 4년째 붙박이 장사를 하다 보니 괜히 없던 정이 생기는 건지, 그 정이라는 걸 같은 배를 탄, 아니 같은 건물에 세 든 임차인이라는 동료애라고 해야 할지 가늠이 잘 안 되는 어떤 감정이 요새 부쩍 든단 말이지. 오전 느지막이 문을 여는 이모를 발견하면 어제 보고 오늘 또 보면서도 오랜만에 보는 친구처럼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고, 발길 뚝 끊긴 손님들로 모처럼 국숫집이 둘썩거리면 내 일처럼 흐뭇하다. 무얼 그리 열중하는지 테블릿PC에 빨려들어갈 것처럼 집중하는 이모를 뒷마당 화장실 오갈 때 슬쩍 엿보면 그 화면 속에 막장드라마가 펼쳐지건 트로트 열창이 벌어지건 제발 재밌고 신나기를 바랄 뿐이다. 대봉, 상추, 고구마 따위를 바리바리 들고 국숫집 문지방을 넘어가 생색을 내는 재미가 은근 쏠쏠하고 그 빌미로 국숫집 이모와 몇 마디 나누는 한담도 즐겁다. 이러다가 혹여 깎새가 이모를 흠모한다는 소문이라도 날지 저어되지만 그런 염려는 염려 축에도 못 낀다. 깎새와 연치가 제법 벌어진 데다 무엇보다도 깎새가 좋아할 스타일이 아니다. 무시하지 말라. 깎새도 나름 여자 보는 눈이란 걸 달고 사니까.

정이니 동료애라고 둘러댔지만 기실 대놓고 으르렁거리지 않았다 뿐 한동안 격조하기가 이를 데 없었던 국숫집 이모한테 근자에 왜 갑자기 호의가 두드러졌는지 곰곰 더 따져 보면 짚이는 구석이 없지 않다. 머리 깎으러 오는 날이면 꼭 국숫집까지 들러 국수 한 그릇 때워야 직성이 풀리는, 대선이니 총선, 지선 따위 선거 시즌만 되었다 하면 여느 정치평론가 못지않게 그 판세를 잘 읽고 술술 풀어내는데 그게 또 거의 들어맞는 신통방통한 능력을 가진 영감이 내놓은 인물평이 깎새 마음을 은근히 뒤흔들었던 게 아닌가 싶다.


- 그 아지매가 여간내기가 아인 기라. 내보다 더 난리야 정치 얘기 하마. 근데, 확실한 건 빨간 쪽은 아이야. 광화문에서 태극기 들고 난리 치는 영감할마이들을 사람 취급도 안 해. 내도 입심이라면 어디 가서 꿀리지가 않는데 그 아지매 정치 얘기로 입에 거품 물마 감당이 안 되는 기라.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정치 성향이 깎새 마음을 호의의 바다로 이끌었다면 아니라고 부인은 잘 못하겠다. 부산아지매 치고 좀 드물어서 경외롭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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