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레에서 다치바나 다카시로(1)

by 김대일

<빌푸네 밥상>은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에 출연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핀란드 세 청년이 한식을 배우는 여정을 담은 2021년에 방영된 TV예능이다. 각자 요리할 한식 메뉴를 정해 요리법을 습득해 가는 과정이 대견하면서 재밌었는데, 한식을 배우자니 한국어도 알아야 해서 그들은 한국말 익히기에도 여념이 없었다. 그들 중 막걸리에 진심인 빌레라는 청년은 자기만의 방법으로 한국어를 습득했는데 특히 눈길을 끌었다.

한국어를 일단 한글로 쓴 뒤 영문자로 발음 기호처럼 써서 소리를 따라하고 그 의미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식이다. 예를 들어 '옵니다'란 낱말을 한글로 쓴 뒤 영문자로 발음을 표시하면서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행위를 그림으로 그려 넣는다. '갑니다'도 똑같은 방식으로 사람이 문을 열고 나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만 다르다. 모양(한글), 소리(발음), 의미(그림)를 그 자리에서 한꺼번에 익히는 그만의 공부법이 참으로 신박했다.

빌레 한국어 공부법이 인상적이다 못해 자극이 몹시 되었던 모양이었다. 책을 읽거나 대화 도중에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낯선 낱말이나 관용구, 속담을 체크하고 메모를 해 뒀던 말 꾸러미가 적잖았다. 그것들이 쌓여 가는 건 흐뭇했지만 정작 써먹을 줄 모르는 게 난제였다. 적재적소에 배치할 요량으로 쟁여 뒀는데 막상 어디에 갖다 붙여야 할지 활용법을 몰라 끌탕만 하다 무위로 돌아가곤 하는 것이다. 빌레 공부법처럼 실용적이지 못하거나 정리하는 것까지는 나름 바지런을 떨었지만 정리된 것들을 정작 떠올리는 데는 실패하는 까닭이 혹시 빌레 그림 같이 연상할 연결 고리가 없어서일지 모른다고 고민의 고민을 거듭했다. 빌레 그림처럼 탁! 하고 떠오르는 자기만의 방식을 그림은 그릴 줄 모르니 그림 말고 다른 꼼수를 부려 보겠다며 궁리의 궁리를 했다. 벽초 홍명희 『임꺽정』에 나오는 대목이다.


미련은 곰새끼구 우악은 억대우구, 오주가 우멍한 눈을 끔벅끔벅하는 걸 보면 나는 언제든지 탑고개에서 뜸베질당하던 생각이 나네. 사람 치구 그따위 무지하구 미욱하구 용통하구 데퉁궂구 열퉁적구 별미없구 변모없는 위인을 우리 사위 양반은 무엇에 반했는지 처음부터 이날 이때까지 꼭 데리구 들어온 자식 두남두듯 속살루 은근히 두남두느라구 애를 부둥부둥 쓸 때가 많으니 그게 아마 전생에 오주의 빚을 지구 이생에 와서 깊은 모양이야.


오늘 다 놀았다. 갖고 놀 낱말이 무더기무더기라서. 자, 시작해 볼까. 우선 낯선 낱말을 찾아 적는다. 물결 모양을 표시한 뒤 그 옆에다 낱말 뜻을 단다. 이런 식으로.



우멍하다~(눈) 물건의 바닥이나 면 따위가 납작하고 우묵하다

억대우~ 매우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소


낯선 낱말 뜻에 지배적인 영향을 끼치는 핵심 낱말을 찾아 밑줄을 긋는다. 키워드로 낯선 낱말을 연상하는 방법이다. 이를테면, '우멍하다'는 '눈'과 '납작'에 밑줄을 긋는다거나 '억대우'는 '덩치', 힘이 센'이 도드라져 보이는데다 '소'는 말할 것도 없이 밑줄 쫙!

거기에 연상시킬 장치를 하나 더 단다. 낱말을 활용한 예시문을 꼬리표마냥 주렁주렁 단다. '우멍하다'를 쓴 예시문을 국어사전을 탈탈 뒤진다.


그는 눈이 우멍한 편이다.

그는 눈두덩이 우멍하고 광대뼈가 툭 튀어나왔다.

저 치사하고 비열하고 우멍하고 쪼잔하고 한심하고 야비하고 비겁하고 멍청하고 유치하고 째째한 자들.(《김용택, 저자들은 애국자》)


예시문을 많이 접해 낱말을 쓰는 운용의 묘까지 터득하고 싶어하는 눈물겨운 연상 투쟁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결국 관건은 입력 대비 원활한 출력이다. 일껏 쟁여 두면 뭐하나, 막상 써먹으려니 기연가미연가하면. 복장 터져 안 죽으면 천만다행이다.

말을 수집하는 취미가 생기고부터 모아둔 말을 기억 창고에다 어떻게 분류하고 알맞게 꺼내 쓸 것인가가 화두가 되었다. 구미에 맞게 차곡차곡 정리해 그때그때 꺼내 쓰는 방법은 자기에게 최적화된 지식 분류 체계를 완성시킨다는 취지와 맥을 같이 한다. 그런 측면에서 2021년 작고한 일본 언론인이자 논픽션 작가, 평론가이면서 다독가로 유명한 다치바나 다카시에게 경도된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 모른다. (글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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