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느리게 가는 장소(1)

by 김대일

심은하 리즈 시절이 나오는 TV 화면을 보던 한 손님이,


- 심은하하면 <M>이란 드라마밖에 안 떠올라요.

- 나는 영화요. <8월의 크리스마스>.


깎새 말이 떨어지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화면은 <8월의 크리스마스>의 한 장면으로 바뀌고 그 영화 시그니처라고 할 만한 사진관이 보이는 동네 전경이 나타났다.


- 군산 어디쯤이라던데 다시 봐도 정겹네요. 그 동네 아직도 있나 몰라.

- 아직도 분명히 있습니다.


대번에 맞받아치는 손님이 신기해서 말꼬리를 놓치지 않는 깎새.


- 최근에 가봐서 잘 아시는갑네.

- 거기 있는 대학을 나와서 잘 압니다.


그러고 보니 부산 짠내가 별로 안 나는 말투긴 했어. 군산에서 대학 생활 마치고 어쩌다 부산으로 넘어와 10년째 살고 있다는 손님은 부산에 적을 두지만 정서는 여전히 그곳으로 향하고 있댔다.


- 거기서 학교를 나왔으면 군산 토박이신가?

- 고향은 정읍입니다.


사회생활이랍시고 첫발을 내디딘 데가 전라도를 기반으로 한 생명보험회사 서울 본사라 어쩌다 보니 전국구 단위 물에서 놀았고 그 덕분에 전국 팔도 출신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그 시절을 좋은 기억으로 품고 사는 깎새인지라 정읍 출신 손님과 호남 지역을 밑천 삼아 얘기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그날따라 눈치 없게 손님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오는 바람에 더는 기회가 없어 아쉬웠다. 염색 물이 시커멓게 든 머리를 막 감기려는데 고개를 숙이다 말고 그 정읍 손님 속엣말이 남았다는 듯 툭 내뱉는다.


- 이 곳 부산은 왠지 바쁘고 급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만 거기는 시간이 느리게 가는 동네라 아늑하답니다.


'부산이 달리 부산이라 부르겠는가. 부산스러우니까 부산이지' 맞장구를 치려다가 '시간이 느리게 가는 동네'라는 표현에 비하면 하찮기 짝이 없어 관두기로 했다. 대신 자주 들어 진부할 법한데 막상 들으니 귓구녕에 콱 박혀 떠날 기미가 안 보이게 여운이 오래가는 '시간이 느리게 가는'이라는 표현을 정읍 손님이 볼일 다 보고 요금까지 치른 뒤 점방 문을 나서서 자취가 사라질 때까지 속으로 곱씹고 또 곱씹었다.

2018년 초가을 무렵으로 기억하는데, 몇 군데 면접을 봤지만 불러주는 데가 없어 심사가 울적하자 혼자 훌쩍 전남 화순 운주사로 향했다. 원래 당일치기로 다녀오려다가 전남 영암에 친한 친구가 사는 걸 떠올렸고, 그 핑계로 하룻밤 묵으려고 55번 지방도를 달리던 중이었다. 한참을 가다가 홀린 듯 멈춘 곳이 정확하게 어딘지는 모르겠다. 교과서에 박제된 활자로만 접하던 나주평야 어디쯤으로만 짐작할 뿐. 탁 트인 곡창지대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광활함은 적막감을 그 꼬붕으로 데불고 다닌다는데 거긴 가을 바람 불어와 목을 간질이는 청량감과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 평화로움이 외로운 여행자를 반겼다. 그러다 모래알 같은 미미한 존재감조차 부질없게 만드는 고요함에 수굿이 젖어들었다. 마침내 충만하게 된 것이다. 마치 세상의 시간이란 시간은 모두 멈춘 듯이. 정읍 손님이 시적으로 표현한 '시간이 느리게 가는'이라는 표현을 직접 대면했던 순간이었다.(글 이어짐)

작가의 이전글살짝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