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김씨' 여자 가수

by 김대일

고등학교 시절, 동아리 활동을 같이 하던 동기 녀석 하나는 주야장천 워크맨을 끼고 살았다. 뭐 그리 재밌는 걸 듣느냐고 궁금해했더니 왜 이제서야 묻느냐는 듯 얼른 제 귀에 늘 꽂혀 있던 이어폰을 빼 건넸다. 1988년 봄이었으니까 유재하가 처음이자 마지막 솔로 앨범을 내고 불의의 교통사고로 불귀의 객이 된 지 1년이 채 안 되었을 무렵이었다.

클래식한 멜로디는 그만저만 들어줄 만했다. 하지만 정작 그 멜로디를 타고 부르는 목소리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명색이 가수라는 자의 음색이라고 하기엔 어째 허약했고 음정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으며 그 목소리로 채워진 수록곡들은 그 당시 가요계에선 보편적이지 않게 생경함 일색이었으니까.

요즘 시쳇말로 듣보잡을 왜 듣느냐고 핀잔을 줬더니 동기 녀석 낯빛이 싹 바뀌더니 대중에 별로 안 알려져서 그렇지 우리나라 가요계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말 불후의 명반이 될 거란 확신에 찼고 그 진가는 언젠가 반드시 드러날 거라면서 대가리 굵은 녀석이 닭똥 같은 눈물까지 뚝뚝 흘릴 때는 감당이 불감당이었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개뼉다구한테 혼이 나가 저리 환장하는지 납득할 만한 설명을 구체적으로 읊어보라고 되묻고 싶었지만 불 난 집에 기름 끼얹는 수작질로 개싸움을 자초할까 두려워 관뒀다.

한국어로 해석하면 금金이니까 김씨 성이 되는 '도라도'라는 필리핀 성을 가진 스무 살짜리 여자 무명가수 노래를 아주 우연히 들은 적이 있다. 현재 한창 경연이 이뤄지는 중인 한 종편 무명가수 발굴 프로그램에 참가했는가 본데, 개인적으로 그런 경연 프로그램은 취향이 전혀 아니다. 어디 가서 목청 좀 쓴다는 사람들만 모아놨으니 다들 한가락 뽑는 실력자들임에 틀림없고 회를 거듭하면서 추린 경연자들을 옷치장 말치장 목청치장 다듬고 꾸며 준 다음에 최종 랭킹을 매기는 경연을 또 붙이는 컨셉은 눈요기로는 봐줄 만할 지 모르겠으나 가창 그 자체만으로 가수의 진면목을 판단하는 근본주의자한테는 요란한 니나노 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가수 본연의 실력, 매력, 잠재성을 점치려면 차라리 안대를 쓰고 귀로만 집중하는 편이 더 낫겠다는 전근대적인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다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다.

벌써 네 번째 시즌인 그 프로그램에 얼마나 숱한 재야의 고수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는가. 그 '필리핀 김씨' 여자 가수도 그렇게 성공이란 신기루만 좇다가 사라질 유망주 중 하나일 뿐이라는 폄하부터 하고 봤던 게 사실이다. 그러다가 첫 경연곡이었던 <세월이 가면>을 접하게 됐다. 제 맘대로 리스트를 뽑은 불후의 명곡 TOP5에서도 상단에 자리한 <세월이 가면>. 한국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외국인이면서 인생의 '인' 자도 채 못 알아먹을 스무 살짜리 애송이 주제에 가당찮게도 그 명곡을 불러댄다기에 무슨 똥배짱이냐며 콧방귀부터 우선 꼈더란다. 그런데, 어렵쇼! <세월이 가면>을 듣다가 가슴이 찢어질 듯한 애상을 느껴본 적은 원곡자 이래로 처음이었다. 경악 그 자체였다.

그럴 리가 없어서 <1994년 늦은 밤>, <환생>, <그때 헤어지면 돼>를 줄느런히 들었다. 하나 예외없이 부르는 노래 족족 가수와 완전히 포개져서 원곡자가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가수가 노래를 완전히 지배한 셈이다. 노래 말고는 다 가식이라고 여겨졌던 가수의 표정과 몸짓조차 노래와 혼연일체가 돼 듣는 이 애간장을 녹이는 위력을 과연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지! 아, 정체가 무엇인가 이 괴물은!

불현듯 고등학교 시절 유재하에 꽂혔던 동기 녀석이 떠올랐다. 이제서야 그 심정 겨우 알 성싶었다. '필리핀 김씨' 여자 가수에게 공연히 벅차오르는 지금 감동이 그 시절 워크맨으로 무한 반복해 듣던 유재하와 다름없다는 걸 말이다.

정말 난생 처음이다. 제 발로 가수 콘서트에 가고야 말겠다는 다짐은.


https://www.youtube.com/watch?v=sYYO0e1Ttc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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