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마다 시를 올리는 까닭

by 김대일

일요일마다 시를 찾아 읽고 게시글로 올리는 까닭은 시를 정말 알고 싶어서다. 어지간한 글줄은 글쓴이가 무슨 의도로 글을 썼는지 제법 간파할 줄 알 만큼 눈썰미가 늘었지만 시는 여전히 미지의 세계다. 하도 답답해서 어떻게 하면 시를 꿰뚫어 볼 수 있을지 이른바 시 전문가들이 쓴 책을 시 옆에 대기시켜 놓는다. 교과서 옆에 참고서 둔 격이라 옥상옥屋上屋이 따로없다. 그럼에도 시 독법은 여전히 제자리를 맴돈다.

소설, 수필 따위 장르와는 전혀 다른 독해력을 요하는 줄 알면서도 무턱대고 읽고 또 읽는다. 무식하다 못해 무모한데도 시 속에 담긴 시상詩想의 끄트머리라도 붙잡을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거란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물론 속셈을 품고 시를 읽는다는 자체가 저열하고 타산적이긴 하지만 그렇게라도 읽어서 사람 바탕을 개조시켜 보겠다는 심산이라면 차라리 순박하지 않은가.




- 시가 그토록 대단한가. 그렇다면 시는, 있으면 좋은 것인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인가. 소설과 영화와 음악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다면 시 역시 그렇다. 그러나 언어는 문학의 매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삶 자체의 매체다. 언어가 눈에 띄게 거칠어지거나 진부해지면 삶은 눈에 잘 안 띄게 그와 비슷해진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마음들이 계속 시를 쓰고 읽는다. 시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시가 없으면 안 된다고 믿는 바로 그 마음은 없으면 안 된다.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 2018, 260쪽)


- ​시 평론가 데이비드 오어가 그의 책 『아름답고 무의미한(Beautiful & Pointless)』에서 보고하기를, 어떤 임의의 X에 대해 '나는 X를 좋아한다'와 '나는 X를 사랑한다'의 구글 검색 결과를 비교해보면, 대체로 '좋아한다(like)'가 '사랑한다(love)'보다 세 배 더 많다고 한다. 예컨대 '나는 음악을 좋아한다'가 '나는 음악을 사랑한다'에 비해 훨씬 많다는 것. X의 자리에 '영화', '미국', '맥주' 등등을 넣어도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이상하게도 '시(poetry)'만은 결과가 반대여서 시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두 배 더 많다고 한다. 왜일까? 나로 하여금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훌륭한 시를 읽을 때, 우리는 바로 그런 기분이 된다. (같은 책, 262쪽)

작가의 이전글교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