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현이란 무엇일까

by 김대일

장사 쉬는 휴일마다 집구석에 처박혀 막걸리나 끼구 앉았지 말고 심신에 도움될 만한 다른 유익한 짓 좀 하라고 큰딸이 하도 혼쭐을 내는 바람에 지난 주 근처 구립도서관을 어렵사리 찾아 책을 빌렸다. 빌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전혀 어울리지 않게 1,000쪽을 육박하는 배게책, 『중국정치사상사』(김영민 저, 사회평론아카데미, 2021)를 고른 건 순전히 저자 때문이었다. 정치사에는 완전 문외한인데다 깎새가 중국정치사상사를 알아서 뭐할까 싶다만은, 눈이 돌아간 건 재차 밝히건대 그 책을 쓴 저자의 글투에 전부터 이미 반한 일명 '빠'의 호승심 탓일 게다.

해학적이고 익살스러우면서도 고상하고 심오함까지 한데 버무려진 필체로 이 시대 문장가로 꼽히는 김영민 교수가 그의 본업인 정치사 연구자로서 전공인 정치사상사를 집필한 저서에까지 문장가로서의 기지가 발휘되었는지 확인하고 싶은 일념 하나로 과감하게 집어들긴 들었다. 하지만 예상대로 이해가 짜치니 문장 따라가는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그럼에도 쉬 포기하지 못하는 까닭은 정치사라는 모르는 영역에 과감히 뛰어들어 지엽적이나마 뭔가를 알아가는 즐거움이 솔찮고, 딱딱한 학술서임에도 언뜻언뜻 비치는 저자 특유의 글투를 발견해 채취해 나가는 과정이 무엇보다 흐뭇해서이다.

연대기 순으로 조직되어 있는 중국정치사상사 서술의 시작은 공자이다. 공자가 등장하니 김영민 교수가 『논어』를 집중적으로 탐구해 에세이로 엮은 저서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사회평론, 2019)과 연계해 읽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두 책 공히 등장하는 '재현representation'이란 대목에서 눈을 부릅뜬 건 당연했다. 먼저 간행된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을 읽었을 무렵 유독 그 대목이 자꾸 눈에 밟혔다. 아마도 당시 '사진은 왜 보는가'란 진지한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그 답을 구하던 때라 그랬었나 본데 그때 생각을 상기시켜 또 다시 골몰하게 만드는 불쏘시개 역할을 『중국정치사상사』가 하고 만 것이다. 우선 『중국정치사상사』에서 '예술적 재현'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앵커스미트가 환기하는 바에 따르면, '재현representation'이란 어떤 대상이 현 상황에서 부재不在하다는 전제 아래 그 대상에 대한 대체물을 제시present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재현 개념이 함축하는 바는,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재현물일 뿐 원래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재현 행위는 해당 대상을 그대로 구현할 수 없음을 인정한 상태에서 그 대상을 '대신'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 재현하고자 하는 대상과 재현물 자체를 동일시한다면, 그는 '재현'이라는 개념 자체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재현 대상을 복사하듯 동일시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재현은 미학적 재현과 구별되는 모사적 재현mimetic representation이다. (『중국정치사상사』, 75~76쪽)



같은 저자가 같은 내용을 사뭇 기발한 필치로 쓰면 다음과 같다.



역사 역시 지도처럼 재현이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에 대해서도 보르헤스의 사고실험을 적용해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관한 연구자 한 명이 조선시대를 완벽하게 재현하는 역사책을 쓰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리하여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추안급국안』 등 모든 관련 자료를 섭렵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그는 (사료 역시 재현이지만) 실제 사료와 모든 점에서 일대일로 정확하게 대응하는 아주 상세한 역사서를 쓰기 시작한다. 그의 작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될수록 그의 역사책은 점점 더 두꺼워져 간다. 그래서 마침내 그 역사책이 현존하는 조선시대 사료와 완벽하게 조응하게 되었을 때, 그 역사책의 분량은 현존하는 사료의 분량과 똑같게 된다. 문제는 그렇게 두꺼운 역사책은 수십 년이 걸려도 다 읽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료와 똑같다면 그냥 사료를 들여다보면 되는데, 무엇 하러 똑같은 분량의 역사책을 들여다보겠는가?(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218~219쪽)



그렇다면 모사가 아닌 재현이 성공하려면 어떠해야 할까? 이어지는 대목에서 그 힌트를 구할 수 있다. 덧붙여 사진사는 무엇을 구현해내기 위해 사진을 찍는지, 우리는 그 사진에서 무엇을 볼 것인지에 대한 미학적 접근에 천착한다.



재현이란 어떤 대상이 부재하다는 전제 속에서 그 대상이 대체물을 제시present하는 것임을 기억한다면, 이런 모사의 강박에서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즉 재현 행위는 해당 대상을 그대로 구현할 수는 없음을 인정한 상태에서 그 대상을 '대신'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학자 프랑크 안커르스밋은 재현을 모사와 동일시하지 말고, 좀 더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자세를 취하라고 권고한다. 현실을 모사하려고만 하는 이는 늘 '더 진짜인' 현실에 패배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식이라면 세상의 모든 화가와 사진사는 연속되는 패배에 지쳐 우울증에 걸리고 말 것이다. 실로 모사는 재현이 현실과 맺을 수 있는 하나의 관계에 불과하다. 더 창의적인 재현은 현실'을' 모사하고자 하는 집착을 버리고, 현실에 '대하여' 재현하려 든다. 영정 사진이 얼마나 훌륭한지는, 그 영정 사진이 망자의 검버섯 하나하나를 얼마나 핍진하게 보여주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망자에 '대하여' 얼마나 잘 이야기해주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위의 책, 220쪽)



아마 공자 에세이를 읽을 무렵이었을 게다. 하루는 이런 글을 게시한 적이 있다.



사진을 전문적으로 배워 본 적이 없으니 즉물적 실감에 의한 품평이 전부이겠으나 나름 기준이라는 건 있다. 가공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인 이미지로 프레임에 격납된 피사체. 그것은 실체에 근접해 진실을 표방하려는 노력의 산물로써 정의내리는 사진이란 예술이다. 조작과 왜곡이 판을 치고 실체와 허상을 분간하지 못하는 지경일지라도 본연한 본질은 절대 부정되어서는 안 되니 내가 최우선으로 여기는 사진의 미덕은 핍진성이다. 사진은 객관적이라는 꼬리를 달고 있다는 발터 벤야민의 표현처럼 말이다.

허나, 적나라하게 드러난 피사체에 열광하면서도 대상 이면에 숨겨진 뭔가에 주목하고 싶다. 암호를 해독하듯 사진이 함축한 진실을 탐구하려는 시도로써 사진 보는 내내 즐거운 조바심이 인다. 보이는 것 너머를 보고자 하는 욕망, 어쩌면 그것은 벤야민의 또 다른 표현, 사진으로 혁명하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나타난 모습 그 자체가 진실이 아닐지 모르니 현상'을' 집착하지 말고 현상 속에 가려진 본질에 '대하여' 탐구하는 자세를 취하라는 건데, 참 쉽지가 않다.

작가의 이전글시 읽는 일요일(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