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적화된 욕망

by 김대일

다음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사상가 중 한 사람인 양주의 입장이다. 중국정치사상사에 관한 저서에서 퍼오다 보니 저자가 양주를 정치사상적으로 분석하는 건 당연하다. 내친 김에 저자의 분석까지 소개한다.



100년은 수명의 한계다. 100세까지 사는 이는 1,000명에 한 명 꼴도 안 된다. 그런 사람이 한 명 있다고 하더라도, 포대기에 싸인 어린 시절과 흐릿한 노년기가 생애의 반을 차지한다. 밤에 자느라 활동하지 못하는 시간, 깨어 있는 낮에도 머물러 쉬는 시간이 또 거의 반에 해당한다. 병들어 고통받고, 실의에 빠져 근심 걱정하는 것이 그것이 또 거의 반에 해당한다. 그러고 남는 시간은 십수 년에 불과한데, 그나마도 여유롭게 자득하고 걱정 없는 때는 한순간도 없다. 그러니 인생에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즐길 것인가? 좋은 의복, 가무와 여색을 좇을 따름이다. 좋은 옷은 항상 물리도록 즐길 수 없으며, 가무와 여색은 늘 감상하고 희롱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도리어 형벌로 금하거나 상으로 권유하는 것을 따르고, 명예에 얽매여 나아가고 법에 걸려 물러나며, 정신없이 일시의 헛된 명예를 다투고 사후의 영광에 얽매인다. 조심스레 눈과 귀가 보고 듣는 것을 따르고, 제 생각이 옳은가 그른가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당장의 지극한 즐거움을 읽는 것은 물론이고 한순간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중죄인이 감옥에 갇힌 상황과 무엇이 다르리오!(『열자』 「양주」, 김영민 『중국정치사상사』, 사회평론아카데미, 2021, 192~193쪽에서)



그런데 양주는 정치 안에서의 자유freedom in politics가 아니라 정치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politics를 추구한다. (···)

양주는 인간 본성이라는 이슈를 제기한 최초의 사상가이거나 혹은 그런 사상가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양주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예의 그물에 연루되어 있는 존재로도, 태생적으로 도덕적인 존재로도 보지 않는다. 양주에 따르면, 풀을 뜯고 있는 양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신의 육체적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다른 좋다는 것들에 휘둘리지 않고 무병장수하기 위해서는 부와 명예를 향한 무분별한 욕망 같은 것은 제어되어야 마땅하다.(위의 책 193쪽)



정치사상사 다룬 책을 도덕책으로 오독하는 경향이 농후하지만, 정치를 떼고 그 자리에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갖다붙인 뒤 양주를 다시 읽으면 유한한 인간이 가진 쥐좆만 한 자유를 어떻게 향유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이 많아진다. '~안에서의 자유'가 아닌 '~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려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어야 할까.

'apatheia'는 마음의 평화다. 세상이 내게 부여한 분수만큼만 누리다가 고요하게 저무는, 야욕이 불러일으키는 마음의 소요를 잠재주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갈구하는 자세 말이다. 에픽테토스가 썼다는 『엥케이리디온』에 이런 구절이 있다지.



너는 극작가의 뜻에 따라 결정된 연극 속의 배우라는 것을 기억하라. 작가가 연극이 짧기를 바란다면 그 연극은 짧을 것이고, 길기를 바란다면 그 연극은 길 것이다. 작가가 너에게 거지 역할을 맡긴다면, 이 역할조차 또한 능숙하게 연기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작가가 너에게서 절름발이, 공직자, 평범한 사람의 역할을 원한다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너는 그 역할을 해야만 하고, 너에게 주어진 그 역할을 잘 하는 것이 너의 일이기 때문이다. (『엥케이리디온』17장 에서)



저자가 양주는 '각자에게 최적화된 욕망에 충실하다 보면 결국 조화로운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했으리라 해석한 대목(위의 책 194쪽)에서 양주와 에픽테토스가 자꾸 겹치는 건 왜일까. 내친 김에 알아봐야겠다. 양주와 에픽테토스가 정말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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