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을 두고 동양적 사고의 가장 심층에 놓여 있는 기본적 사고 양식(신영복)이라고 한다. 달리 표현하면 세상 만물은 정지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 변화와 상호 연결성을 인식해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사유 방식이라는 것이다.
주역 64괘 중 마지막 괘인 화수미제를 그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어린 여우가 강을 거의 건넜을 즈음 그 꼬리를 적셔 이로울 바 없다(未濟亨 小狐汔濟 濡其尾 无攸利)'로 읽히는 괘사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되 완성을 향해 여전히 지속하고 있다는 희망 선언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화수미제火水未濟
<괘사>
未濟亨 小狐汔濟 濡其尾 无攸利
미제괘는 형통하다. 어린 여우가 강을 거의 다 건넜을 즈음 그 꼬리를 적신다. 이로울 바가 없다.
<단전>
彖曰 未濟亨 柔得中也 小狐汔濟 未出中也
濡其尾 无攸利 不續終也 雖不當位 剛柔應也
미제괘가 형통하다고 하는 까닭은 음효가 중中(제5효)에 있기 때문이다. 어린 여우가 강을 거의 다 건넜다 함은 아직 강 가운데로부터 나오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그 꼬리를 적시고 이로울 바가 없다고 한 까닭은 끝마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모든 효가 득위하지 못하였으나 음양 상응을 이루고 있다.
<상전>
象曰 火在水上 未濟 君子以 愼辨物居方
불이 물 위에 있는 형상이다. 다 타지 못한다. 군자는 이 괘를 보고 사물을 신중하게 분별하고 그 거처할 곳을 정해야 한다.
최후의 괘가 완성 괘가 아니라 미완성 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깊은 뜻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변화와 모든 운동의 완성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연과 역사와 삶의 궁극적 완성이란 무엇이며 그러한 완성태完成態가 과연 존재하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태백산 줄기를 흘러내린 물이 남한강과 북한강으로 나뉘어 흐르다가 다시 만나 굽이굽이 흐르는 한강은 무엇을 완성하기 위하여 서해로 흘러드는지, 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무엇을 완성하려고 바람 서리 견디며 서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실패로 끝나는 미완성과 실패가 없는 완성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보편적 상황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반성이며, 새로운 출발이며, 가능성이며,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완성이 보편적 상황이라면 완성이나 달성이란 개념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완성이나 목표가 관념적인 것이라면 남는 것은 결국 과정이며 과정의 연속일 뿐입니다.(신영복, 『강의』, 돌베개에서)
잘 극복하지 못하는 게 있다. '나는 겨우 이것밖에 안 돼'라는 패배주의를 쉽사리 떨쳐낼 수가 없다. 아닌 줄 알면서도 '여기까지가 끝'이라고 단정짓는 나쁜 버릇은 거의 고질이다. '아닌 줄 알면서'라는 단서는 매우 중요하다. 앞으로 살 날을 꼽아보면 지금까지 산 날보다 적을 공산이 큰 실존적 위기감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으니 긴하지 않은 하루하루가 아니라서 어제보다 가치로운 오늘을 이루려는 바람이 날로 날로 간절하다. 하지만 그것을 완성태로 드러냈던 적이 있었던가 자문하면,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절망한다. 어제보다 매상이 형편없고, 마누라한테 줄 생활비마저 지난달보다 줄어든 장부를 받아들면 4년씩이나 장사를 했다는 놈이 도대체 여태껏 뭐했냐고 스스로를 심하게 몰아붙인다. 경기가 안 좋고 엄동설한 탓을 둘러댄다 해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오르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이랄지 회의감을 막을 방도가 별로 없다. 비단 장사뿐이랴. 목표한 것들을 완성하거나 달성해 봤던 경험이 일천한 사람일수록 과정에서 맛보는 희열에 둔감하기 마련인지라 '겨우 이것밖에 안 되'는 스스로를 야속해하고 경멸할 뿐이다. 아닌 줄 알면서도 말이다.
화수미제 괘사를 간혹 떠올린다. 나는 채 자라지 못한 어리석고 어린 여우라서 강도 제대로 건너지 못해 여전히 꼬리를 적시고 앞으로 그런 우를 계속 범하지 않으리란 장담도 못한다. 하여 결국 세상 이로움과는 거리가 먼 채로 살지 모른다.
신영복은 지남철을 일러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자기에게 지니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고 했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그것을 버려야 한다고도 했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에.
어리석고 어린 여우는 끝내 미성숙한 채로 도태될지 모른다. 성체로 자라 보겠답시고 강을 건너고 또 건너지만 그럴 적마다 꼬리를 매번 적신다. 그럼에도 끝내 포기할 수가 없다. 강을 건너다 꼬리를 적시는 그 예외없는 불찰이 결국 여윈 바늘 끝을 불안스럽게 떨어야 그 존재 가치가 입증되는 지남철처럼 나의 '본질'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요원한 완성을 향한 미완성의 부단한 몸부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