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 중 특히 노인층은 엄동설한이 닥치면 더 늙고 처량해 보인다. 이전보다 동작은 더 굼뜨고 어떤 노인은 얼이 빠져 있는 듯 멍하다. 비유가 마땅찮지만 꼭 히말라야 등산대 짐을 나르고 안내하는 셰르파가 8,000고지에 다달아 기념으로 찍은 사진 얼굴을 닮았다. 멀쩡하던 양반이 예전 같지 않지 않는 건 결국 삭풍이 늙는 속도를 부추겨서일 게다. 하여 하루가 다르다는 푸념이 남 일이 아닌 듯 서럽게 여겨진다. 오십 줄도 중반을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는 깎새 역시 요즘같은 한파를 겪으면 구석구석 삐걱거리지 않은 데가 없고 회복도 무척 더디니까.
늙어갈수록 서럽긴 하다. 소싯적에는 전혀 못 느끼던 심신의 변화, 그로 인해 열패감이랄지 좌절감의 경험치가 쌓이고 쌓이면서 서러움의 농도는 짙어진다. 혹자는 살아 숨쉬는 것이라면 생로병사에 예외가 없다며 숙명론자로 자못 달관한 척하던데 그러는 품이 머리가 벗겨지니 복건을 쓰기 편해 좋다고 호기를 부리고 이가 빠졌으니 씹지 않고도 넘길 수 있는 술을 즐길 이유가 더해졌다고 너스레를 떠는 옛사람들을 닮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울어진 운동장을 복구시키진 못한다. 무정한 세월이 야속할밖에.
실학의 개두開頭라는 성호 이익이 남겼다는 '노인의 좌절 열 가지'를 읽는다. 해당되는 게 몇 개나 되는지 손꼽는 자신을 발견하고 재밌어 하다가 이내 크게 좌절한다. 들어맞지 않는 게 단 한 개도 없으니 환갑이 채 멀었는데도 내가 벌써 노인이란 말인가!
노인의 좌절이란,
① 대낮에 꾸벅꾸벅 졸음이 오고,
② 밤에는 잠이 오지 않으며,
③ 울(哭) 때에는 눈물이 없고,
④ 웃을 때에는 눈물이 흐르며,
⑤ 30년 전의 일은 기억되나,
⑥ 눈앞의 일은 문득 잊어버리며,
⑦ 고기를 먹으면 뱃속에 들어가는 것이 없어도,
⑧ 모두 치아에 끼며.
⑨ 흰 얼굴은 도리어 검어지고,
⑩ 검은 머리는 도리어 희어지는 것이다.
명문가의 자제이면서 개인적 자질 또한 뛰어났으나 평생 벼슬길에 들어서지 않고 명산대천을 찾아 노닐며 학문에 힘을 쏟았다는 삼연 김창흡이 늙어 앞니 하나가 갑자기 빠지자 "얼굴이 망가져서 만남을 꺼리게 되니 차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고, 발음이 부정확하니 침묵을 지킬 수 있으며, 기름진 음식을 잘 씹지 못하니 식생활이 담백해지고, 글 읽는 소리가 유창하지 못하니 마음으로 깊이 볼 수 있게 된다"고 했단다. 신체 기능이 옛날 같지 않아도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더 많다는 정신 승리 선언이나 다름없다. 몸뚱아리가 쇠약해진다고 마음과 정신까지 시르죽을 것까지야 없지 않느냐는 선인의 당당함을 본받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야 겨우 이 망할 놈의 좌절감과 맞설 수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