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껏

by 김대일

일본 최고 작가라는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을 시류에 영합해서라도 샀거나 읽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 참으로 희한하다. 남들 열광하는 거면 궁금해서라도 슬쩍 엿보기라도 할 텐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무라카미 하루키는 손도 안 탔다. 자신의 문장은 블랙 코미디 소설가로 유명한 커트 보니것한테서 영향을 받았다고 오래된 인터뷰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런 커트 보니것 소설은 읽어봤어도 무라카미 하루키는 정말이지 손을 전혀 안 탔다. 다만, 문학평론가인 신형철이 쓴 산문집에 등장하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노르웨이의 숲』 한 대목을 접한 뒤로는 다른 건 차치하고라도 그 소설만은 꼭 통독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대단하다.


"네가 너무 좋아, 미도리."

"'너무'라니, 얼마나?"

"봄날의 곰만큼."

"그게 무슨 말이야, 봄날의 곰이라니?"

"봄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같이 부드럽고 눈이 똘망똘망한 새끼 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게 말을 건네지. 안녕하세요, 아가씨. 나와 함께 뒹굴기 안 하겠어요? 그래서 너와 새끼 곰은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그거 참 멋지지?"

"정말 멋져."

"그만큼 널 좋아해." (『노르웨이의 숲』(1987))


문학평론가가 그 대목을 가져다 쓴 까닭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관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위해서는 물론 아니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너무'라는 부사를 예로 들어 개인의 고유성은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어휘와 어법에서도 생겨난다면서 신선한 어휘를 구사하기 위해 노력하고 독창적인 표현을 만들어 보려 애쓰는 것은 능력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성의의 문제에 더 가깝다고 일갈하려는 수작이지. 하도 무성의하게 사용해 흔해빠진 어휘는 더 있다.


본래 '진품임'을 뜻하는 'authenticity'의 번역어로 정착된 '진정성'이라는 단어는 철학과 사회학에서 긴 역사를 갖고 있는 개념인데, 정치인들이 그야말로 '진정성 없이' 습관적으로 사용한 탓에, 이제는 듣기만 해도 넌더리가 나는 말이 돼버렸다. 또 나는 최근에 어떤 좌담을 읽다가 참석자들이 '굉장히'라는 부사를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좀 놀랐다. 정말 굉장할 때는 어쩌려는 것일까. '굉장히 굉장한'이라고 해야 할까.(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 2018, 360쪽)


아무튼, 신형철은 '너무'라는 간편하고 흔해빠진 부사어에 습관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이를 여섯 줄의 문장으로 바꿔낸 무라카미 하루키 성의를 높이 평가했다. 그 여섯 줄 덕분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지은 그 소설이 '무척' 궁금해졌다. '무척'이 습관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꼭 읽어 보고 그 후기를 성의껏 표현해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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