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큼해도 잠시 정차하는 여유

by 김대일

이문구 단편소설 「장천리 소태나무」 (소설집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문학동네, 2000) 배경이 되는 충청도 한적한 시골은 언제부터인가 '산길 들길 논길 밭길 개릴 것 없이, 신작로구 흔작로구 닥치는 대루 차가 들어가는 길이면 들어가서, 낮이구 밤이구 차만 서 있다 허면 꼭 그 지랄덜'이었다. 하여 주인공 이송학씨한테 가다가 말구 길에서 거시기해쌓는 차를 말리며 계도하는 단속반장을 맡겼다. 그런데 한 중다리 차주가 변명이랍시고 늘어놓는 사설이 참으로 적반하장이었다.



- 이보슈. 인간의 평균 수명이 얼마요. 한 칠십 정도가 아니우. 그러면 평균 칠십 년 잡구, 인간이 그 칠십 년을 향해서 가는 속도가 얼마나 되는지 알우? 나도 얼마 전에야 우연히 어떤 책에서 보구 깜짝 놀랬시다마는, 무슨 얘기냐 허면, 인간은 앉은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두 그 칠십 년을 채우기 위해서, 즉 죽음을 향해서 시속 사십 킬로루 달리구 있다 이거요. 자 그러니 가다가 안 서게 됐수? 그것도 차루다가 달리는데 가다가 더러 안 설 수가 있겄느냐 이거요. 그러찮수? 어떠슈, 들어보니 무거워요?



차주가 봤다는 그 '어떤 책'이 궁금하다. 죽음을 향해서 달리는 시속 사십 킬로 근거가 무엇인지 당최 궁금해서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봤지만 결국 못 찾았다. 이문구 선생이 제멋대로 지어낸 것 같지는 않고.

시속 이백삼십오 킬로로 날아가는 양궁 화살에 빗대 쏜살같이 지나가는 세월이라고들 한다. 아무리 득달같다 한들 사람 인생이라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순식간이라 퉁치기에는 숱한 사연으로 점철되어 있다 보니 말이다. 하여 '죽음을 향해서 시속 사십 킬로로 달리는 차'라는 표현이 훨씬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만약 소설가가 지어낸 것이라고 하면 그 설득력이 가공可恐할 지경이다.

실상 속도감을 느끼기에 부족한 감이 있긴 하나 시속 사십 킬로도 만만찮게 느리지 않다.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이면 시속 사십 킬로가 전혀 심상하지 않은 속도란 걸 안다. 하여 소설 속 인물이 말한 내용이 맞는다면 대단히 섬뜩하다. 인생이 소멸하는 속도가 우리가 체감하는 것보다 어쩌면 훨씬 빠를 수 있으니까. 그러니 가끔 멈출 줄도 알아야 한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말이다. 설령 카섹스를 즐기려는 응큼한 발상에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세울 수 있을 때 잠시 인생이라는 차를 정차한 뒤 즐기는 여유를 누릴 줄 안다면 인생을 유익하게 영위하는 방법을 좀 아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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