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는 일요일(246)

by 김대일

소동

안희연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거리로 나왔다

슬픔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려고


어제는 우산을 가방에 숨긴 채 비를 맞았지

빗속에서도 뭉개지거나 녹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퉁퉁 부은 발이 장화 밖으로 흘러넘쳐도

내게 안부를 묻는 사람은 없다


비밀을 들키기 위해 버스에 노트를 두고 내린 날

초인종이 고장 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자정 넘어 벽에 못을 박던 날에도


시소는 기울어져 있다

혼자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나는 지워진 사람

누군가 썩은 씨앗을 심은 것이 틀림없다

아름다워지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어긋나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


기침할 때마다 흰 가루가 폴폴 날린다

이것 봐요 내 영혼의 색깔과 감촉

만질 수 있어요 여기 있어요


긴 정적만이 다정하다

다 그만둬버릴까? 중얼거리자

젖은 개가 눈앞에서 몸을 턴다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물방울들


저 개는 살아있다고 말하기 위해

제 발로 흙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길 즐긴다


("내가 여기 있소!"라고 소동을 일으키지 않더라도 나는 지금-여기 있다. 비록 '아름다워지려던 계획이 무산되었'어도 땅 속 씨앗은 어긋날지언정 꾸역꾸역 자라듯이.

시는 희망을 노래하면서도 절망을 먼저 전제하는 대목에선 장난꾸러기가 소동극을 벌이듯 짓궂기까지 하다. 물론 희망을 더 부각시키려는 장치일 테지만 절망을 절망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없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받아들인다.

개인적으로 시인이 참 스마트해 보인다. '어긋나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라는 단 한 줄 싯구로 시 분위기를 확 전환시키는 능력이 탁월해서. 시인의 다른 시도 찾아봐야겠다.)

작가의 이전글포기도 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