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글은 깎새 직업적 자존심에 기스를 낸 단골 에피소드였다. 성질 더러운 깎새는 그놈의 불뚝성 때문에 손님과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이곤 하는데 그래봐야 손해보는 쪽은 깎새다. 손님 끊기고 더러운 성깔만 새삼 드러날 뿐인데도 불구하고 깎새 입장에서 굳이 항변하자면 가만히 있는 깎새 자존심에 기스를 내는 도발을 제발 말아 달라는 거다.
어제 밝힌 대로 깎새의 직업적 자존심은 크게 두 가지다. 늘어나는 단골 수 증가와 희박한 수정 요청률. 그 두 가지를 견인하는 요체는 여지껏 갈고 닦았던 기술력이다. 깎새 어깨가 으쓱해질 때는 손님이 공치사를 늘어놓을 때가 아니다. 석가모니가 연꽃을 들어보이자 그 뜻을 깨달았다는 듯이 가섭이 지어 보이던 미소처럼 앞거울에 비친 잘 다듬어진 제 머리를 보고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손님한테 무한한 감사를 느낀다. 반면 공들여 깎는 중에도 불신의 시선으로 깎새의 동태를 살피면서 뭐가 그리 불만인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손님이 이발의자에서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면 그대로 뒤통수를 갈기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오른다. 깎새가 따로 '찔끔찔끔 손님'이라 명명한 재수없는 족속들은 겨울철에 특히 발호한다.
일기日氣가 건조하고 음랭해지면 손님 요구는 까다로워진다. 긴 머리가 구차해 깔끔하게 치켜 올리라는 주문이 쇄도하는 무더운 계절이 일하기는 훨씬 편하다.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이 바리캉만 갖다 대면 그만이니까. 자칫 가이드라인을 침범하는 실수를 저지른다손 "더운데 차라리 잘 됐지 뭐. 시원하고 좋구만." 손님 쪽에서 먼저 융통성을 발휘하니 우호적 분위기로 훈풍이 절로 인다. 하지만, 매서운 삭풍에 가로수 낙엽이 뒹굴 무렵이면 넉넉한 인심은 온데간데없이 180도 달라진 변덕쟁이로 돌변하는 손님이다. 계절이 바뀌어 태세 전환을 감행한 손님을 깎새 혼자서 '찔끔찔끔 손님'이라고 부른다.
구레나룻은 살려두고 덥수룩한 숱을 살짝만 정리하라는 주문이 들어왔다 치자. 그 '살짝만'이 도대체 어느만큼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손님이 단골이 아니고 그날 초면이면 '살짝만'은 손님과 깎새 사이에 커트의 적정선을 두고 양측의 대립이 첨예한, 금방이라도 드잡이가 벌어질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상태를 조성하는 그야말로 마지노선에 다름 아니다. 앞거울을 째려보면서 깎새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손님 눈초리가 하도 매서워서 어떨 땐 간담이 서늘할 지경이다. 손님 다루는 데 이력이 제법 났음에도 그런 식의 긴장 구도는 여전히 어색하고 부담스럽다. 행여라도 손님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못마땅한 짓, 즉 용납할 수 있는 '살짝만'이라는 선을 약간만이라도 넘어섰다 싶으면 남들 보기에 대수롭지 않을 뿐더러 표도 잘 안 날지언정 점방이 떠나갈 듯 원성이 득시글거리곤 한다.
겨울이 본격적이면 독이 오른 손님이 특히 많다. 치렁치렁한 숱을 솎으려고 숱가위를 드는 순간 쌍수를 들어 뜯어말린다거나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듯 머리털이 지상가상없이 잘려 나갔다 싶으면 작업을 중단시킨 채 거울을 연신 보기 바쁘다. 울그락불그락 달아오른 손님 안색을 살피지 않고 눈치 없이 작업을 이어갔다간 불 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라 주의가 요망된다. 하여 그런 기미가 설핏 비치기만 해도 작업 템포를 확 늦춰야 한다. 평소 깎는 속도보다 표나게 더디거나 괜히 점방 문을 열었다 닫는다든지 창문 너머 뒷마당을 실없이 내다보는 식으로 터지기 직전인 과열 양상을 확 식혀야 한다.
간신히 작업을 마치고 커트보를 거두고 나서도 '찔끔찔끔 손님'은 끝까지 경계 대상이다. 두말없이 나가는 법이 없으니까. '살짝만'이 제대로 구현되었는지를 거울이 뚫릴 듯 재차 삼차 확인하는 건 기본이고,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부분이 눈에 띄면 당장 수정을 요구하는 것 역시 정해진 수순이다. 손님 입장에서야 당연한 피드백일지 모르겠지만 이런 게 깎새 자존심에 기스를 내는 장면이다. 바리캉을 드는 순간 그가 누구건 손님이라면 예외없이 정신일도해 스타일 완성에 심혈을 기울이는 깎샌데 말이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커트보를 두 번 치게 만듦으로써 속에 꽁꽁 눌러뒀던 불뚝성을 기어이 터지도록 유발한다면 김장 배추 절이듯 그 잘난 머리에다 굵은 소금이라도 뿌리고 싶은 충동이 안 생길래야 안 생길 수가 없다.
손님과 벌이는 감정 대립은 싸우기 전부터 결론이 이미 나 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싸워본들 불리한 쪽은 깎새다. 저항이랄지 반항이랄지 구도를 전복할 단어를 암만 갖다붙인들 아쉬운 쪽은 늘 깎새다. 손님이야 안 오면 그만이니까.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영특한 이는 눈치를 애저녁에 깠을 거이다. 깎새 저자는 이 따위 신세타령이라도 하면서 제 스트레스를 푸는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