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구

by 김대일

대중문화비평가도 아니면서 손석구라는 배우의 자질을 논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가 분했던 몇몇 캐릭터에 반한 적은 있다. <멜로가 체질>이란 드라마에서 괴팍한 CF감독으로 나왔을 때, 영화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에서 농담이나 실없이 던지는 성싶지만 어린 여주인공을 살뜰히 챙기는 약사로 존재감을 드러냈던 손석구는 특히 인상이 깊다. 손석구라는 실제 인물에 대해서는 그의 가족이 아닌 이상(가족이라고 해서 꿰뚫어 본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 됨됨이를 속속들이 알 리 없고 관심도 없다. 실제 배우와 그가 맡은 배역을 혼동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착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술한 드라마와 영화 속 배우 손석구한테 반한 까닭을 밝히자면, 이 세상에 손석구라는 사람만이 드러낼 수 있는 징표, 즉 그만의 특유한 말투랄지 거동, 풍기는 인상 따위가 맡은 배역에 녹아들어 화학작용을 조화롭게 일으켜 매력적인 캐릭터로 거듭나서였다. 그걸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속정'이다. 겉으로는 무뚝뚝하고 새침한 척하지만 은근하면서 진실된 마음을 품은, 그렇게 속정이 깊지만 결코 상투적이거나 어수룩하지 않은 세련된 의뭉스러움으로 극 중 상대뿐만 아니라 그걸 지켜보는 관객들까지 무장해제시켜 버리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흔히 '츤데레'라는 시쳇말로 통용되는 인물상을 손석구가 어쩌면 한국식으로 구현했는지 모를 일이다.

깎새가 여지껏 끼적거렸던 글 나부랭이들 중에서 손석구가 등장하는 드라마의 한 장면을 묘사했던 대목을 특히 좋아하면서 자뻑을 할 때가 있다. 그 대목을 읽어 나가면 자연스레 드라마 장면도 따라 떠오르는 건 물론이고 극 중 손석구가 친 대사를 또 따라 읊조린다. 극 중 손석구와 가급적이면 비슷한 발성과 발음과 말투로 말이다. 당연하게도 손석구만이, 손석구라서 드러낼 수 있는 징표 중에 어느 하나 닮은 구석이 없는 까닭에 아주 놀고 자빠졌다. 하지만 새삼 느껴보는 것이다. 수천수만 마디 위로의 말보다 더 강력하게 느껴지는 '당신 눈동자에 건배'라고 해석되는 "here's looking at you, kid."라는 대사 속 '속정'의 위력을 말이다.

손석구를 닮은 단골이 발길이 뜸한 지가 꽤 됐다. 깎새 멋대로 이름 붙인 '도플갱어 연상법'의 첫 번째 대상이었던 손님이었다. 장사 초창기 손님 얼굴을 기억하려고 얼굴깨나 알려진 유명인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구석이 있으면 그와 똑 닮았다고 머릿속에 입력시켜 놓고 그 손님이 다음번에 점방을 찾으면 그걸 구실 삼아 입을 놀려 환심을 사려는 수작이었다. 딴 데로 이사를 안 가는 한 확실하게 단골 노릇할 손님이었는데 신상에 변화가 생긴 건지 도통 오지 않는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제목이 <멜로가 체질>이랬던가. 세 여주인공 중 은정(전여빈 분)은 옛 애인의 허깨비하고 먹고 놀고 얘기한다.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나 본데 계속 말하지만 드라마를 처음부터 보지 않아 잘 모르니 설명은 생략하고, 하여튼 잘 나가는 CF감독이면서 은정처럼 전 재산을 기부해 기부계의 양대산맥, 기부계의 두 또라이 중 한 사람인 상수(손석구 분)가 은정과 티격태격하다가 어찌어찌해서 ​술자리를 가지는 장면. 상수는 여태 말하지 않았던 서로의 얘기나 하자고 제안한다. 그러고 드라마 수록곡인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 향이 느껴진거야'만 들리고 디졸브. 음성은 들리지 않지만 얘기를 하는 은정이나 그 얘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는 상수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건대 은정이 옛 애인의 허깨비와 지낼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털어놓는 걸 이해하려는 듯 보였다. 배경으로 깔리던 음악이 그치고 장면이 전환되자 상수는 은정의 잔에 소주를 따르고 자신의 잔에도 따른다. 그리고 잔을 들면서 말한다.


- here's looking at you, kid.

의아해하는 은정을 보면서 덧붙인다.

- 카사블랑카에 나온 대사야. 우리나라에서 참 멋지게 번역됐지. 당신의 눈에 뭐가 보이든… 난…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잔을 드는 상수. 맞춰 줘야 하니까 은정도 짠이나 하려고 잔을 든다. 상수는 그 잔을 지나쳐 은정의 눈에 잔을 가져다 댄다. 수배자의 인상착의(특히 눈매)를 기억해뒀다가 체포하는 우치무라나 무엇을 보건 이해하겠노라며 은정의 눈동자에 건배를 하는 상수나 두 눈을 통해 상대를 알아챘다. 다른 데는 몰라도 눈은 거짓말을 하지 않나 보다. (깎새 글 <here's looking at you, kid>에서, 2021.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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