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의 날개를 달고 한국 정치를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나이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다. 나이 들수록 보수주의자 색채가 짙어지는 건 사실이지만 합리적이길 늘 바란다. 매일 신문을 펴면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부끄러워하며 정치면을 그냥 넘기곤 한다. 대목 만난 장사치마냥 정치 모리배들로 야단법석인 요즘같은 대선 정국에서는 특히. 내가 무슨 구루같이 거창한 담론을 펼치려는 건 아니지만 가까이는 내 두 딸들에게, 우리 다음 시대를 짊어져야 할 MZ세대들에게 구태의연하고 시대착오적인 정치판을 그대로 물려줘야 하는가에 생각이 미치면 미칠 지경이다. 세상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 중의 하나가 된 이유 중에는 지붕이 열리면 로보트 태권V가 날아오른다는 곳에 모인 부끄러움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족속들이 자기들만의 리그에서 천날만날 이전투구를 벌이는 까닭이 큰 몫을 차지하는 게 맞다.
김누리 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16년을 총평하는 칼럼을 냈다.(<메르켈 시대 16년과 대한민국 정치>, 한겨레, 2021.10.27.) 메르켈 총리의 지지율이 여전히 75%를 넘는 것은 그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와 사랑이 아직 식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나는 필자가 메르켈 집권 16년이 우리나라 정치에 주는 시사점 중 한 대목에서 깊은 공감이 일었다. 1949년 서독이 건국한 이후 2021년 현재까지 독일의 정치사는 16년을 주기로 중도우파(기민당)와 중도좌파(사민당) 정당이 주기적으로 정권을 교체해왔다고 한다. 이러한 '16년 주기 정권교체'야말로 독일을 세계에서 가장 성숙한 민주국가로 만든 '숨은 공신'이다. 지난 72년 동안 독일은 기민당의 성장 중시 정책과 사민당의 분배 지향 정책이 주기적으로 교체됨에 따라 성장과 분배가 이상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안정적인 복지국가로 발전해온 것이다. 즉 정치지형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이다. 그러면서 필자는 우리의 정치지형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극단적으로 우경화되어 있다고 했다. 보수를 참칭한 수구, 진보를 가장한 보수가 서로 과두 지배하는 정치지형이 우리의 진짜 모습이고 이러한 '수구-보수 올라가키'로 인해 우리는 '사회적 지옥'으로 치닫고 있다는 비판은 신랄하다. 그렇다! 우리 정치에 진보는 잘 안 보이고 죄다 의사보수 아니면 수구꼴통들 뿐이다.
필자는 메르켈의 정치를 통해 보수정치의 본질을 되돌아본다. 보수주의는 무엇보다도 공동체보다 개인을 우선시하는 자유주의와는 달리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더 중시하는 정치적 이념이다. 그래서 보수주의는 공동체의 원형인 민족을 중시하고, 공동체의 과거인 역사를 중시하며, 공동체의 생활양식인 문화를 중시하는 것이다. 메르켈이 '사회적 시장경제'의 노선을 견지하고, 독일 통일의 의미를 소중히 여기며, 과거 청산과 난민 수용의 정책을 펼친 것은 보수의 긍정적 면모에 부합한다고 했다. 이러한 합리적 보수주의가 독일을 '존경할 만한 나라', 메르켈을 '신뢰할 만한 지도자'로 만들었던 원동력인 셈이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는? 자칭 '보수'라고 하는 자들은 공동체를 말하면 '빨갱이'라고 공격하고, 민족을 말하면 '용공'이라 비난하며, 역사를 말하면 도망가거나 왜곡하고, 문화하고는 담을 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한다. 한국 정치의 비극은 이처럼 좋은 보수가 없다는 데 있다는 지적은 뼈에 사무친다.
동네 사랑방처럼 너무 편해서 그런지 몰라도 점방에서는 온갖 요설이 난무한다. 그 중 내가 제일 참기 어려운 망발은 개도국 시절에나 통했을 법한 성장 일변도의 국가우선주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발전만이 국민들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니 퇴보를 부르는 그 어떤 장애물은 모두 반역이라는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고방식. 근거라는 게 검증되지 않은 유투브나 정체불명의 찌라시에서 비롯된 '카더라'가 다임에도 박통, 전통 때가 대한민국 국운 상승기였다는 둥 5·18, 세월호를 음모론의 틀에 집어넣고 제멋대로 주물럭거릴 때는 정치적 발언에 갑론을박하다간 손가락 빨기 십상이라는 이발사의 숙명조차 망각하고 덤벼들 기세다. 이쪽 아니면 저쪽 편을 들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는 걸 비난해서는 안 되겠지만 보수와 진보, 성장과 분배를 적절하게 균형 이루는 무티 메르켈같은 리더십이 우리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