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기구 옆 고양이

by 김대일

비 온 뒤 기온이 뚝 떨어진 엊그제 아침. 아파트 동 앞에서 사람을 기다리다가 화단 기계실 환기구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했다. 아침저녁으로는 한겨울 못지않게 냉기가 매서운데 거기 자리잡은 품이 안방 아랫목인 성싶다. 편히 한때를 나고 있는데 '뭘 봐? 가던 길이나 마저 가쇼' 불청객 쳐다보듯 표정이 영 시큰둥하다. 요 녀석 봐라. 사진이라도 찍을 요량으로 그쪽으로 걸음을 바짝 옮기니 슬쩍 긴장하고 불청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별일 아니라는 듯이 원위치다. 어찌 보면 만사가 귀찮은 것 같고 또 다르게 보면 세상천지에 이리 편하고 따뜻한 데도 없다는 듯 즐기는 것 같고. 그런 녀석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나는 문득 녀석이 무척 부러웠다. 자고 싶을 때 자고 쉬고 싶을 때 쉬고 먹고 싶을 때 먹는 녀석은 온전히 자기주도적이다. 그에 비해 나는 시간과 돈에 쫓겨 제때 자지도 쉬지도 먹지도 못한다. 본능을 억제하고 이성적이고 규칙적으로 사는 게 인간다운 삶, 더 나아가 만수무강, 부귀영화로 가는 유일책인 줄 알았지만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닌 인생인데 감옥 같은 틀에 나를 너무 가둬놓고 산 건 아닌지 좀 많이 억울하다. 환기구에서 불어오는 온풍에 몸을 맡긴 채 졸음 겨워하는 고양이가 그토록 부럽게 느껴지는 건 내가 사는 방식이 썩 좋지 않다는 방증임에 틀림없다. 이런 걸 실존적 자각이라고 어렵게 말하는 걸까.

아침 볼일 보고 급히 병원을 들렀다. 며칠 전부터 온몸이 쑤시고 저렸으며 바윗덩이 인 듯 무거웠다. 엉덩이 주사에 약 처방을 함께 내린 동네 주치의가 "뭔 대단한 일 하길래 몸살 감기래?" 농을 걸어왔다. 내 말이. 아침에 환기구 옆 고양이가 떠올라 얘기를 꺼내려다가 실없단 소리 들을까 봐 관뒀다.

작가의 이전글<라스트 듀얼>이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