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대 초반에 일찌감치 샐러리맨 생활을 접어서 직장인이나 그 직장인이 승승장구해 임원을 달고서 퇴사한 이후 은퇴 생활에 대해서는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나 접했을 뿐 실감이라곤 일도 없다.역시 공무원 '공' 근처에도 안 가봤으니(직업상담사랍시고 9개월짜리 구청에서 공공근로한 것 빼곤) 기관장들의 그것은 또 말해 뭣하랴. 내 은퇴 걱정하기에도 골머리가 아파오는데 남 신경 쓸 오지랖이 웬말이겠냐마는 여행 감독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직업을 가진 고재열이라는 양반이 쓴 한 칼럼은 나와는 전혀 딴판으로 살았지만 같이 늙어갈 기업 임원 또는 기관장을 역임한 이들의 은퇴 이후 인간관계를 '법인카드의 사회학'으로 독특하게 접근해서 자못 흥미롭다.(<법인카드가 떠난 자리>, 경향신문, 2021.11.11.)
법인카드를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생기는 현타(현실 자각 타임)로는 우선 법인카드를 쓰거나 대접받는 버릇이 그대로 유지되는 경우다. 특히 대접받는 데만 익숙하다 보니 교외 괜찮은 식당에서 맛있게 식사하고도 아내가 계산을 하면서 자신을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는 시선에 뒤통수가 수시로 따갑다.
남한테 대접받던 버릇은 쉽게 못 고치는 반면 쓰는 데는 급격하게 인색해진단다. 결제한도가 큰 법인카드마냥 현재의 위치가 영원할 것으로 착각해 은퇴 후를 대비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배우자 역시 절실하지 않아 재테크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나. 평범한 직장인보다 훨씬 많은 연금을 받아도 현직 때 씀씀이 때문에 '가난하다'고 느껴 소비성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고도 했다.
필자가 생각하는 최악은 대접받던 관성과 훈수 두던 관성이 결합한 때란다. 대접은 대접대로 받으면서 잔소리를 하는 자기중심주의는 고독으로 가는 특급열차라나. 자신처럼 과거가 화려했던 전직자의 모임에서조차 자신을 능가하는 '꼰대력'으로 무장한 선배들이 버티고 있어 입지가 불안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이다.
전성기 때는 문전성시를 이뤘지만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하자 문전작라로 돌변하는 염량세태에 좌절만 할 게 아니고 이런 현실을 슬기롭게 헤쳐나갈 전직자의 비결이 있긴 할까. 필자가 내놓은 건 간단하다. 개인카드로 더치페이 하라. 그러고도 얼마든지 좋은 만남을 가질 수 있단다. 주머니 사정이 가벼울수록 형편에 맞게 적응해나가는 것이 무릇 인간의 본능이니 깔끔하게 제 것만 계산하는 행동이 꼭 누가 그러라고 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작동하는 바라 비결이라 꼭 말할 수도 없겠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려 하지 말고 상대를 주인공으로 만드는, 수직이 아닌 수평적인 인간 관계를 견지하면 은퇴 이후가 외롭지 않을 거란다. 하지만 들어 백 번 옳은 필자의 충고에 나는 좀 회의적이다. 놀던 가락이 그리 쉽게 바뀌겠는가. 부리고 대접받는 데만 익숙한 습성을 목욕탕에서 때 벗기듯 단박에 벗길 수 있는 사람 별로 없다고 나는 본다. 버릇 굳히기는 쉬워도 버릇 떼기는 힘들다는 속담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니까. 그러니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꼰대니 라떼 만랩을 타파하려는 본인 개조 노력은 필수다. 나이 들어서 사람들하고 어우렁더우렁하자면 한도 큰 개인카드 가지고 있지 않는 이상 그 길밖에 없다. 그러니 인생 이모작도 어째 참 지난하다. 하기야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냐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