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도시

by 김대일

수북이 쌓인 먼지 틈으로/외로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그 책/여기저기 여행하며/누군가의 라면받침이,/누군가의 아끼는 책이 되었다가,/돌고 돌아 이제는 외로이/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그 책/어쩌면 헌책이 아니라 이 세상/하나밖에 없는 한정판이 아닐까(임지나, 「보수동 책방골목 와보시집」 중 <그 책>)

2021. 01. 16. 한겨레신문 토요판 커버스토리는 부산 동주여고 학생들과 교사가 추억이 깃든 보수동 책방골목을 소재로 손 글씨로 쓴 시집「보수동 책방골목 와보시집」(이하 「와보시집」)을 내고 단편영화까지 만들어 ‘보수동 살리기’에 나서 잔잔한 관심을 일으켰다는 소식이었다. 평소 도시재생에 관심이 많았고, 나고 자란 곳이 보수동 바로 옆 동네인 동대신동이라 중·고등학교때부터 자주 찾던 곳이 책방골목이었다는 국어교사 김성일은 책방골목이 위기라는 얘기를 들어오던 터라, 대부분 보수동 인근에 사는 동주여고 학생들과 함께 책방골목 살리기 사업을 해보면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교내 방송으로 도시재생에 관심 있는 학생 8명을 모았다. 그들의 시집, 영화 만드는 작업 참여는 자발적이었다.

지역 미담 소개 정도로 그칠 것 같던 기사는 장장 2면을 통으로 할애해 이제는 국내 유일한 헌책방 골목인 보수동 책방골목의 흥망성쇠와 버거운 현실을 써내려 간다. 2009년 부산시가 ‘부산 미래유산’ 20개 가운데 하나로 지정했고 관할인 부산 중구청도 책방골목에서 매년 문화축제를 연다, ‘책방골목 문화관’을 만든다, 골목 활성화 지원 사업을 맡을 TF를 꾸린다는 둥 딴에는 부산을 떨어대지만 골목 상인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건 하나도 없다는 번영회장의 푸념이 눈에 밟혔다. 도시재생이라는 미명 아래 벌어지는 전시 행정의 일면 같아서 말이다.

보수동 책방골목을 살리려면 책방골목이 의미하는 바가 뭐냐는 ‘정체성’에 천착한 도시재생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주장은 대단히 타당하다. 책방골목을 그저 장사하는 곳, 막연히 향수와 추억을 파는 곳, 생색내기 행사를 위한 행사장 정도로만 여길 게 아니라 역사, 시민의 삶과 기억, 책의 유통, 보수동 주민과의 소통이 어우러지는 제도적인 보완이 필요하다는 전문가들의 분석 및 제언은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하지만, 그 기사가 나온 지 10개월 만인 2021.11.15. 한겨레신문은 14일 부산 중구와 보수동책방골목번영회의 말을 빌어 최근 책방골목 가운데 건물 2개가 부동산업체에 팔렸고 여기에 책방 3곳이 있다고 했다. 이들 책방 사장들은 건물주한테서 "3개월 안에 가게를 비워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는 소식도 함께 전했다. 보수동책방골목번영회 회장은 "개인 간 매매계약이라 뾰족한 대응책이 없어 답답하다. 업체가 건물 2곳을 허물어 고층 오피스텔을 짓는다고 전해 들었을 뿐"이라고 말했고 "책방골목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는 책방이 사라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지자체는 책방골목 보전 정책을 세워 실행할 수 있도록 애써달라"고 덧붙였다. 중구청 주무 담당자는 "상인들과 협의해 구체적 대책을 마련할 계획이다. 부동산 업체와 접촉해 건물 1층에 책방 우선 세입을 요청하는 등 적극 대응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책방골목 퇴락은 어쩔 수 없겠다. 관할 구청이 대책을 마련한다지만 실현 불가능하다. 돈이 되느냐 아니냐로 모든 걸 저울질 하는 마당에 추억이니 향수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사인 간의 거래에 공무원이 끼어든들 뾰족한 수가 없을 게다. 큰돈 들여 오피스텔을 짓겠다는 건물주가 로얄층인 1층에 장사도 잘 안 될 것 같은 책방 세입을 우선 놓겠다고?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오히려 그 이름도 짝자그르한 커피 체인점을 유치해서 책방 닮은 인테리어나 살짝 꾸미고는 책방골목을 활성화시키네 어쩌네 구색 갖추는 게 임대료 받아먹는 데 훨씬 수월할 게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보수동 책방골목'은 명색 뿐이다. 껍데기만 남는 셈이 된다.

어쭙잖게 내 감상을 밝히는 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잘 알면서도, 점점 껍데기로만 남는 부산이 안타깝다. 머릿속에 온통 돈, 돈, 돈뿐인 협잡꾼들로 인해 고색창연했던 부산은 살 발라먹고 내버려지는 생선 껍데기 같다. 과거의 유산이 추해 보인다고 모든 옛것을 깔아뭉갠다. 그 자리에 새로운 오피스텔, 새로운 아파트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간다. 언제부터인가 일신우일신만 지상 최대 과제가 된 휘황찬란하게 변질되어가는 부산. 새롭고 편리하며 거들먹거리는 것만이 가치의 기준이 되어 버린 도시는 공허하다. 살은 없고 껍데기로만 남은 공간은 실제가 아닌 드라마 세트장 같아 차갑다. 세트장은 드라마가 종영되면 목적을 상실한다. 그러다 다른 새 드라마 세트장을 만들려고 허문다. 공허하고 차가운 도시는 사람 살 만한 곳이 못 된다. 사람 없는 도시에 새롭고 높은 건물이 올라간들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런 도시는 죽은 도시다. 죽어가는 부산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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