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빈은 대안적 사회의 정치경제 질서를 설계하고 구축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연구와 활동을 병행해 온 정치경제학자라고 한다. 경향신문 2021.11.16. 그의 기명 칼럼 <홍기빈의 두 번째 의견-주4일제와 정규직 중심주의>는 일부 대선 주자들이 제안한 주4일제 공약에 대한 반박글이다.
그의 견해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우선, 한국의 불평등 간극은 1 대 99에서 20 대 80으로 이동한 상태다. 주4일제는 당연히 임금 삭감 없이 노동일만 줄어드는 조치일 테고 은행, 관공서, 공기업, 대기업, 대학과 학교 등 정규직 작업장의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혜택이 엄청나게 돌아가겠지만 그 밖의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극히 불균등하거나 전혀 없거나 오히려 '벼락거지'가 되는 허탈함만 나타날 것이다. 가뜩이나 나은 상태에 있는 상위 20%에게 더 큰 혜택을 주는 사회정책은 기존의 불평등을 심화시킴으로써 '정의로운 전환'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의 사회 경제는 이미 주4일제를 시행한다고 해서 다 함께 멈추어 서는 잘 정돈된 한가한 사회가 아니다. 사람들이 놀 줄 모르고 쉴 줄 몰라서 밤낮으로 일을 하는 게 아니다. 현재의 분배 구조에서는 도저히 삶의 견적이 나오질 않기에 이를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살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주4일제 제안은 우리 현실을 도외시한 채 유럽이나 서구의 진보정책을 그대로 가져와 '쿨하게' 보이는 데에 집착하는 우리 진보 진영의 버릇이 나타난 예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이 진영의 사고와 행동 방식을 은연중에 지배해 온 또 하나의 뿌리 깊은 편향을 본다고 필자는 꼬집는다. 나는 특히 정규직 중심주의에 대해 비판하는 대목이 굉장히 인상깊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각종 사회 경제 정책을 생각하고 입안함에 있어서 정규직으로 관리되는 작업장의 정규직 노동자들을 그 사회를 대표하는 존재들처럼 여겨 이들을 표준으로 삼은 각종 요구를 진보정책으로 제시한다. 정년 연장제, 임금피크제 철폐, 육아휴직 강화 등이 그 예인데, 우리나라 노동인구 중에서 정년이 보장된 이들의 비율이 얼마나 되고, 정년이 보장된 50대 후반의 직장인들 이외의 사람들에게 임금피크제 철폐가 무슨 의미가 있으며, 고용 안정성이 불안한 노동자들, 프리랜서, 영세 자영업자들에게 육아휴직의 강화가 어떤 혜택을 주는가? 사실상 이런 정책과 요구는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는 주로 상위 20%를 더욱 윤택하게 해주는 것들인데 이런 것들이 과연 진보적인 사회 정책이라고 불리는 게 온당한가?
19세기 말의 2차 산업혁명 이후 대공장 체제가 들어서게 되면서 작업장과 생산 단위의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커지게 되었고 좌파 진영(생디칼리슴-노동조합 지상주의)이나 우파 진영(기업 국가) 공히 사회를 작업장과 동일시하는 생각이 지배하게 된다. 이는 대공장이라는 정규적 작업장에서 노조에 가입되어 있는 정규적 노동자들이 사회 전체의 일반 이익을 대표하는 존재들이라는 대표성을 가지게 되고 자본 대 대공장 조직 노동자들의 구도가 어느새 자본 대 사회 일반이라는 구도처럼 보이게 된다. "조직된 정규직 노동에 좋은 것은 사회 전체에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마치 당연한 진리인 것처럼 진보 진영을 횡행하게 된다.
21세기 산업사회의 현실은 디지털 혁명이 가져온 '초연결성'으로 인해 생산 과정은 이제 작업장과 완전히 분리되어 전 지구의 곳곳에 스며든 네트워크의 인드라망으로 퍼져 버렸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고용 관계의 피고용인이 노동자의 정의라면, 이제 그런 노동자의 개념으로는 생계를 위해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 전체를 절대로 대표할 수가 없다. 그리고 지금 경제적 궁핍과 삶의 피폐화로 비틀거리고 있는 이들은 그렇게 대표되지 않는 쪽에 압도적으로 많다. 이것이 기본소득이나 기본서비스와 같은 대안적인 사회 정책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홍기빈은 마르크스의 시대가 가고 프루동의 시대가 (되돌아)왔다고 했다. 자본주의의 운동법칙은 사회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공장으로 만들어 갈 것이며 이에 임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조직화되어 자본을 철폐하고 생산 전체를 사회화하는 것이 답이라고 주장한 마르크스가 20세기 산업사회에서는 진리였을지 몰라도, 피고용자 혹은 자영업자 등과 같은 법적 형식을 초월하여 자본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정신적·육체적 능력을 발휘하여 삶을 꾸려나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생산자'라는 큰 범주로 포괄해 이들이 자본의 독점과 횡포에 맞서 서로서로를 도와 협동조합과 은행과 시장 네트워크를 만들어나가는 사회의 모습을 제시한 프루동의 비전이 21세기 산업사회에서는 현실에 가깝다고 했다. 필자는 다음과 같이 칼럼을 끝맺는다.
- 지금 내 옆에서 힘겹게 헐떡이고 흐느끼며 살아가는 다양한 이름과 직종을 가진 사람들의 신음과 넋두리를 듣는 데에는 후자가 훨씬 더 도움이 된다.
만약 20세기 생디칼리슴적 사고에 매몰된 자들의 편향된 인식에서 비롯된 제안이 주4일제라면 이른바 진보 진영이라는 자들은 퇴행적이고 후진적이다.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사회에 맞설 보다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을 고민하는 나는 우선 정의당부터 탈당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