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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 안의 자식

by 김대일

잠자는 큰딸을 쳐다본다. 아직 앳된 얼굴이 깨물어주고 싶을 만치 사랑스럽지만 점점 낯설어진다. 서울서 학교 다니는 친구 보러 간다며 훌쩍 떠났다가 사흘만에 집에 왔다. 오는 즉시 저녁 알바 뛰고 밤 늦게야 제대로 귀가했다. 역시 주말에 알바를 뛰는 아비는 큰딸과는 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야 잠자는 얼굴로 상봉한다.

원하던 학교와 학과 다 떨어지고 그나마 대기번호 받고 들어간 학교다. 재수하겠다는 거 인생 낭비하는 짓만은 절대로 안 된다는 아비의 강경한 태도에 결국 진학을 결정했지만 애시당초 학교 생활에 정 붙을 리 만무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증유의 역병이 돌면서 입학식은커녕 강의다운 강의 한 번 못 받아본 채 대학 생활의 절반이 날아갈 지경이다. 흥미도 애정도 없는 학과 공부 말고 다른 살 궁리 찾겠다며 매달린 게 약학대학원 편입이다.

큰딸은 남부럽지 않게 돈을 벌어 떵떵거리며 사는 게 지상 최대의 목표다. 이재에는 완전 맹추면서 돈만 쫓다 집안을 패가망신 일보 직전까지 몰고 갔던 아비와 쪽박 찬 지아비 대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새끼들만이라도 어떻게든 안 굶기겠다며 쎄가 만발이 빠지는 어미를 어릴 적부터 똑똑하게 목격한 큰딸로서는 돈만이 맹수 우리 같은 세상과 맞짱 뜰 수 있는 유일한 무기라고 거의 필사적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약사라는 직업은 녀석이 생각해낸 부자가 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면서 제 깜냥으로 승산이 충분하다고 판단해 올인한 것이리라.

학교 비대면 수업과 편입 공부를 본격적으로 병행한 건 작년 여름부터였다. 큰 기대없이 경험 삼아 올해 시험을 쳐봤다. 준비가 부족했는지 좋은 성적은 못 거뒀다. 감 잡았다면서 절치부심이다. 패기는 가상하다만 만만찮은 건 분명하다. 어미는 공부하겠다는 녀석 밑으로 솔찮게 들어가는 경비에 부대끼면서도 전폭적이다. 돈 얘기만 나오면 아비는 죄인인 양 아무 말 못 한다.

세상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성싶은 큰딸은 자기가 정해놓은 프로젝트를 하나씩 마치면 분을 풀듯 뒤풀이가 과한 경향을 보인다. 대입시험 치르고 얼마 안 지났을 때다. 생전에 술이라고는 먹어본 적 없는 녀석이 친한 친구와 해운대 포차집에서 겁없이 혼자서 소주만 다섯 병을 까고(맥주, 막걸리도 마셨다는데 몇 병인지 기억을 못했다. 소주로만 주량을 판별하는 건 아비 때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자정 넘겨 집에 들어오자마자 제가 마시고 먹었던 걸 속에서 모두 꺼내 보여주는 쇼를 부모 앞에서 펼쳤다. 장관이면서 가관이었다. 어미는 경악했지만 아비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기시감에 헛웃음만 나왔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마치거나 편입시험을 치른 뒤, 하다못해 다니던 알바를 그만두면 지상가상없이 퍼마시는 대신 어딘가로 훌쩍훌쩍 떠난다. 보통은 친구 이름과 연락처를 담보로 잡고 그 친구네에서 하룻밤 자고 오는 식이다. 술이라면 쌍심지를 세우는 어미 눈치 안 보고 양껏 퍼마시는지는 아니 봐서 잘 모르겠다. 다만 틈만 나면 자꾸 나대는 품이 둥지 떠나려고 요란하게 날갯짓하는 새끼같아 괜히 서운하고 무심하다. 무심하다라…. 큰딸은 아비를 닮은 구석이 징글맞도록 많다. 역마살 낀 것처럼 밖으로밖으로 나대는 건 특히. 그 아비가 대학 학력고사를 치른 뒤였지 아마. 합격 통지를 받은 뒤 해야 할 일을 다했다는 안도감에 집-학교만이 다라고 여겼던 인식틀이 일순 비틀렸고 스프링이 튀듯 집 밖 세상으로 뛰쳐 나가려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그 무렵 막 손을 댄 술과 담배가 신선놀음을 부추겨 한시도 집구석에 가만히 붙어 있질 못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게 노는 게 집에서보다 훨씬 편했고 즐거웠다. IMF 전까지는 7~8년이 더 남았었고 샴페인을 일찍 터뜨렸을망정 아직 호황이었다. 대학만 나오면 버젓한 직장 구하는 게 썩 어렵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변변하게 가진 거 없고 능력이 모자란 둔재라도 뒤져보면 먹고 살 만한 자리 하나쯤은 마련할 수 있는 세상이라고 분수도 모르게 기고만장했다. 세상은 넓고 놀 일은 천지삐까리라서 밖으로 나돌면서 바쁘게 허랑방탕했고. 군 복무 중 휴가를 받거나 사회초년생으로 서울살이할 무렵 가끔 귀향을 하면 얼굴만 잠깐 비추고는 휑하니 집 밖으로 싸돌아다녔다. 다 큰 자식한테 말 보태봐야 군소리밖에 더 되겠냐는 듯 양친은 한번도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비가 결혼을 해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아비를 닮아 천둥벌거숭이마냥 깝신대는 꼴을 목도하면서 당시 아비의 아비 어미가 처했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함을 그제서야 똑같이 겪고야 만다.

아직 품 안의 자식인 게 맞고 바람 불면 꺼질세라 애지중지하고픈 마음이야 변함이 없는데 대학 물 먹고 버스비도 성인요금 내는 다 큰 사람을 여태 아이 취급하면 어떡하냐고 따지고 들면 할 말이 궁색해진다.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한 데가 아니니 밥을 먹어도 더 먹었을 꼰대의 산 경험을 기회의 장으로 활용해 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하면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도 시원찮을 판에 시작도 하기 전에 꼭두각시처럼 조종당하는 게 온전한가, 그러니 너나 잘하세요라고 대들면 얼굴 앞으로 절대 못 본다. 가방끈 짧은 아비의 아비 어미는 혹시 제 자식이 그렇게 따박따박 말대답해올까 두려워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이 숯검댕이가 될지언정 지켜만 봤을지 모를 일이다. 어디 가서도 꿀릴 것 없는 지방 명문대를 나왔다고 자부하는 아비 역시 소싯적 지은 죄가 많아 괜히 켕겨서인지 큰딸 앞에 서면 말문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따위로 뒷담화나 까지.

곰곰히 생각해보면 부모 자리는 경험의 내리 물림 같다. 미리 알아두면 참 좋으련만 시간 간극이 커 후회만 두고두고 쌓이니 여간 안타까운 게 아니라서 문제지만. 아비는 그 시절 아비의 양친을 반추하면서 한 가지 큰 결심을 한다. 결국 품 안의 자식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제 하고잡은 대로 냅둬 보자고. 그렇게 저도 아비 나이가 될 즈음 머리에 탁! 하고 깨치는 게 분명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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