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에 마음이 확 기운 건 엉뚱하게도 다찌가 결정적이었다. 한 이십 년 전쯤 통영시 공무원인 고종사촌 형이 강구안 한 다찌집으로 나를 안내했고 금방이라도 상다리가 휘어질 것처럼 뻑적지근하게 차려 나온 주안상에 완전히 매료된 나는 없는 거 빼곤 다 있는 다찌야말로 내가 찾던 이상향을 참 많이 닮았다고 안주를 우걱우걱 씹어 삼키면서 엉뚱한 생각에 빠졌다. 그러고는 다찌집이 즐비한 통영이야말로 내 말년을 기댈 유일한 곳이라 낙착을 봤다.
동양의 나폴리라는 흔해빠진 슬로건을 굳이 갖다 대지 않고도 통영은 충분히 빼어나다. 한려수도의 절경을 안은 천혜의 땅, 역사와 예술이 도처에 녹아들어 일상이 된 곳, 고기붙이보다는 해산물에 입맛을 더 다시는 내가 환장할 먹거리가 지천에 널린 곳, 다른 좋은 이유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면서 미래를 추동하지만 급변을 용인치 않는 유연함이 도시를 부드럽게 감싼 분위기를 나는 늘 동경하고 몸 달아한다. 이런 걸 노스탤지어라고 불러도 될까(부친 고향은 경남 고성이고 구순인 큰고모는 안정이라 불리던 광도면에 계신다. 그곳에 놀러간 어릴 적 장작 패고 고구마도 구워 먹었다).
나이 들수록 더 세련되고 원숙해지는 골드미스 경, 이십 년 가까이 몸담았던 회사를 박차고 나와 제2의 도약을 위해 기력을 충전하던 용이와 작당해 당일치기로 통영을 정처없이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부산 사는 대학 동기 셋이 의기투합해서 성사된 나들이였는데 통영을 적극 민 건 나였다. 통영을 통으로 돌아다니되 목적지를 미리 정하지 말고 떠오르는 대로 돌아다니자고 제안한 건 용이었다. 용이다운 발상. 세병관 마루에 걸터 앉아서 통영 구도심 전경을 즐겼고 싱싱한 해산물 가득한 짬뽕으로 유명한 가게에서 한 끼 때웠다. 충렬사 가서 충무공께 문안 인사를 올린 뒤 바로 옆 백석 시비로 자리를 옮겨 <통영 2>라는 사랑시도 읊었다. 강구안 들러 거북선 내부를 둘러보고 박경리기념관, 청마문학관 들러 문호의 기를 흠씬 느끼기도 했다. 마음 맞는 친구들과 통영을 일주하는 즐거움은 의외의 행복이다. 무엇보다도 부산으로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세월의 격조가 무색하게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허심탄회하게 속엣말을 나눌 수 있었던 건 우리가 통영을 갔기 때문에 가능했던 바라 통영이 내게 크나큰 선물을 안겨줬다고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다.
형 유치진처럼 친일행각 논란이 있는 유치환이지만 그의 시 <행복>만은 나를 늘 두근거리게 만든다. 시구 중 '에메랄드 빛 하늘'은 고즈넉한 통영 앞바다에 비친 하늘로 좋아하는 게 딱히 없을 성싶은 중년 남자가 가장 갖고 싶다고 함부로덤부로 말하고 댕기는 것 중 첫손에 꼽힌다. 여름보다 겨울 통영을 더 좋아하는 나는 찬바람 부는 요새 부쩍 통영이 그립다. 친구들이 그립다.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훤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