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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금을 울리다

by 김대일

그 사람이 그 사람 같고 그 노래가 그 노래 같아서 노래 경연대회는 흥미없다. 때때로 끼가 엿보이는 목소리에 혹하지만 경연대회라는 서바이벌 틀에 갇혀 그렇고 그렇게 변질되어 버리면 세상에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은 쌔고 쌨어도 심금을 울리는 절창은 드물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트로트를 해외에 알리겠다는 거창한 명분을 내세운 경연 프로그램에서 한 무명 남자 가수가 <누가 울어>를 구성지게 불렀다.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은 자기가 찾던 목소리가 드디어 나타났다면서 쌍수를 들고 반겼다. 그 가수 칭찬받을 만하게 잘 불렀다. 배호에 버금갈 정도는 됐으니까. 특히 '피가 맺히게 그 누가 울어울어' 대목에서는 꺼이꺼이 내가 다 울고 싶더라니까. 하필 염색 손님이 떼 지어 기다리던 때라 더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날 브라운관 통해 처음 본 가수가 내 심금을 울린 건 확실하다. 아니, 그 가수가 격발한 배호로 해서 내 마음의 현이 사정없이 뒤흔들렸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이겠다.

삼십 대에 요절한 조 형은 트로트 메들리를 잘 뽑았다. 고교 동아리 한 해 위 선배였던 그가 부르던 트로트 메들리를 동아리 행사 때 두어 번 들었을 뿐이지만 삼십 년도 훨씬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인상적이다. 당시 호응이 폭발적이었던 데는 대단히 조화롭고 탁월한 레퍼토리 선정이 한몫 했을 거이다. 곡에서 곡으로 넘어갈 때의 간드러진 이어짐은 환상적이었으며 아직 덜 여문 나이였음에도 중후하게 깔리는 중저음으로 불러 재끼는 트로트 가락이 듣는 이를 들었다 놓았다. 트로트가 사람 애간장을 녹일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하도 오래되다 보니 메들리 속 곡들을 기억할 수 없고 직접 묻자니 당사자는 불귀객이 된 지 이미 오래라 영영 알 길이 없게 되었지만 조 형의 성향으로 미뤄 보건대 형이니까 골랐을 곡들 중에 배호 노래는 천하없어도 끼어 있었을 게다.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돌아가는 삼각지>, <누가 울어> 뭐든 간에.

「그 악사樂士의 연애사」라는 단편소설에는 첫사랑이 생각나면 배호 노래를 부르는 여자가 등장한다. 여자는 배호 노래의 특징을 '목이 타서 물을 찾아 헤매는 사람의 창법'이라고 했다.

나무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배호는 사주에 물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평생 갈증에 시달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저렇게 물기를 찾아 방황하는 목소리를 내는데 그것을 수음水音이라고 한다. 수음의 특징은 어둡고 축축하다… 그녀는 설명을 덧붙였다.(한창훈, 『그 남자의 연애사』, 문학동네, 213쪽)

불꽃처럼 살다 스물 아홉에 홀연히 숨을 거둔 배호를 조 형이 많이 닮았다고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결론 내렸다. 시니컬했지만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구하던, 나로서는 달리 규정짓지 못하는 고독감에 휩싸였던 생전 조 형이었기에 목이 타서 물을 찾아 헤매는 배호의 노래는 안성맞춤이었을지 모른다. 어둡고 축축한 수음을 타고난 배호 노래만 불렀다간 어린것들이 무슨 몹쓸 짓을 벌일지 모르니 돼먹잖은 뽕짝 메들리를 곁들여 환심을 샀을 테고 그게 본의 아니게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을 뿐이다. 요절한 배호와 조 형이 남은 자들 심금만 울려 놓고선 먼저 떠나 버렸다는 점도 닮은꼴이다 서글프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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