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서울은 너 같은 놈이 살 데가 못 돼

by 김대일

경향신문 2021.11.24. 헤드라인은 학살자 전두환 사망이 아니었다. "99세 시골 학교, 살려줄 순 없나요" 란 제목이 붙은 개교 99년째인 전남 해남 '북일초' 폐교 위기에 관한 기사였다. 11월 9일, 북일초 교사와 학생들, 마을 주민 등 56명이 마을에 유일하게 남은 초등학교를 살리기 위해 땅끝에서 서울까지 올라왔다. 서울시청 앞에서 '100년 작은 학교 살리기'라고 적힌 현수막을 펴들고 서울 시민에게 호소했다. 기사 속 그들은 절박한 것 같았다. 전학을 오면 주거와 일자리 등을 지원하겠다는 학교살리기 사업도 홍보했다. 면의 유일한 초등학교가 사라지면 면의 유일한 중학교도 위험하다. 학교가 사라진 마을에 사람이 올 리 없고 사람이 없으면 마을도 사라진다. 교육불평등은 반드시 지역불균형을 부른다고 했다. 북일면은 올해 해남 면 단위 중 처음으로 인구가 2,000명 아래로 떨어졌다고 한다.

엉뚱하게도 보따리 싸서 부산으로 아주 내려가던 때가 떠올랐다. 같은 보험회사 직원과 결혼해 맞벌이하면서 수입은 늘고 생활도 안정 일로였다. 회사가 시원찮아 좀 걱정이었지만 내 발로 나가지 않는 한 자리 보전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다른 데로 인수된 뒤에도 고용은 계속 승계되었다). 그렇게 순조로워 보이던 서울생활을 단념하고 나는 부산행을 감행했다. 평생의 패착이라고 마누라가 두고두고 씹는 데는 부산 가서 건드는 일 족족 말아먹은 흑역사에 기인한 바 커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마누라가 들으면 복장 뒤집어지는 소리겠지만, 귀향을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 이유는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밝히기로 하고, 서울깍쟁이보다 부산 촌놈으로 사는 지금이 훨씬 마음 편하다는 정도로만 해 두겠다. 대신 귀향을 결정할 당시 사소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어 겸사겸사 풀어 놓는다.

지금은 교류가 거의 끊겨 뜸한 고등학교 동기는 틈만 나면 부산으로 돌아가라고 옆구리를 쑤셨다. 경찰 시험에 합격해 인천에 있다는 경찰학교에서 연수를 받던 녀석과 4호선 혜화역에서 자주 만났다. 녀석은 서울이란 데가 쓸데없이 넓기만 해 전철 타다가 볼일 다 보겠다며 늘 투덜거렸고 내 집이 있던 2호선 서울대입구 역까지는 너무 멀어서 못 가니 제멋대로 어림잡은 중간지점에서 만나자며 짚은 데가 혜화역이었다. 역 주변 호프집에서 흑맥주를 홀짝거릴 적마다 '서울은 너 같은 놈이 살 데가 못 된다'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씨부렁거렸다. '너 같은 놈'이란 대체 어떤 유형의 인간을 지칭하는지 소상하게 설명하지 않아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서울이란 도시와 나란 사람이 물과 기름마냥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다 종국에는 파탄 날 운명이니 험한 꼴 당하기 전에 어서 빨리 살림 정리해 내빼는 게 신상에 이롭다는 식의 뉘앙스로 들렸다. 여우 같은 마누라 만나 토끼 같은 큰딸 낳고 오손도손 잘 살고 있는 사람 염장을 질러도 유만부동이라며 아구창을 한 방 날려줄 만한데 나는 그 녀석 말에 오롯이 수긍했다. 직관적 통찰이라고 했던가. 녀석은 서울이란 거대도시에 질릴 대로 질린 나를 꿰뚫어 봤다.

서울이 주는 편의성과 우월감은 마약이다. 그것에 취해 버리면 다른 데로 눈을 돌릴 수 없다.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을진대 너와 내가 다르다고 느끼는 순간, 위선적인 인간이 되고 만다. 꿈을 깨듯 내가 위선자라고 깨닫자 서울 속 나는 이질적 존재가 되어 버렸다. 몸에 안 맞는 옷을 입고 다니는 것처럼 불편했고 갑갑했다. 가족이 생기고 기반을 잡아간다고는 하지만 온전한 정착을 용인할 만큼 서울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에 나는 늘 불안해했다. 서울이란 중심을 향해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돌진하려 할 때 나는 밖으로 튕겨 달아나고픈 반역을 매일매일 꿈꿨다. 한강이 바다가 아니듯 서울에는 나의 근본적인 고독감을 없애 줄 그 무엇도 없다고 결론 내리자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딱 이십 년 전 이맘 때 뒤도 안 돌아보고 혈혈단신 서울을 떴다. 그로부터 서너 달 뒤 마누라가 가산을 정리해 부산에 내려왔고 2003년 봄 해운대에 정착해 지금에 이르렀다. 내 귀향에 경찰 짓하는 녀석이 결정적 계기일 리는 없지만 '서울은 너 같은 놈이 살 데가 못 된다'는 녀석의 충고만은 두고두고 내 머릿속에 잊혀지지 않을 녀석의 처음이자 마지막 아포리즘임에는 분명하다.

허울만 근사한 제2의 도시, 부산에서 사는 게 따분한지 나만 빼고 온 가족이 서울에 대한 동경을 거두지 않지만, 꼭 서울이어야 할 강박관념만 버린다면 부산 아니라 땅끝 해남 북일면도 충분히 살 만한 곳임을 나는 확신한다. 학교를 살려달라고 새벽밥 먹고 서울로 올라간 북일초 학생들은 어린 나이에 그걸 이미 알아채 실행에까지 옮겼으니 전도유망한 지역 균형 발전론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아이들이 늘어야 미래가 밝다. 그건 그렇고, 우리 네 가족은 자발적으로 부산에 유입해 부산 인구를 증가시킴으로써 지방소멸 억제에 기여한 바가 크다. 그러니 부산에서는 거들먹거릴 만하다.


작가의 이전글심금을 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