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by 김대일

지난주부터 토, 일요일은 부산 주례동의 한 남성 커트실에서 일을 거들고 있다. 손님이 붐비는 토, 일요일 염색 및 세발을 전담하는 스페어(땜빵 알바)를 급구한다는 친분 있는 커트실 주인(이하 '원장님'이라고 부르겠다)의 요청에 아버지가 화답한 것이다. 나보고는 일주일 내내 당신 밑에 죽치고 있기보다는 가끔 콧바람도 쐬어야 한다면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콧바람은커녕 곡소리가 날 지경이다. 평일은 어떤지 일해 보질 않아서 잘 모르겠고 커트와 염색을 같이 하겠다는 손님들로 토, 일요일 가게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거짓말 좀 보태서. 평일 직원 따로, 토, 일요일 알바 따로 두는데 유독 알바만 얼마 안 있다 관두는 일이 잦다는 까닭을 커트실로 꾸역꾸역 밀려 들어오는 손님들 머리 수만 봐도 짐작이 간다.

염색 및 세발을 주로 하지만 손님이 몰려 원장님 손이 달리면 운좋게 바리캉으로 헛손질이라도 할 수 있는, 그동안 당신 밑에서 수련한 기술을 실무에서 써먹으면서 점점 내성을 기를 절호의 기회라고 여긴 아버지의 복안으로 성사된 파견 근무. 아무리 내일의 안정적인 기반을 닦으려는 오늘의 피나는 분투라고 해도, 피고용인이 불편 없이 일할 수 있게 온갖 편의를 다 봐주는 고용인의 성의가 무지 고맙기는 해도, 힘든 건 힘들다.

커트실, 여기서 잠깐. 남성 머리 깎는 가게를 이발소라고 통칭하면 업계 사람들은 몹시 싫어한다. 흘러간 유행가처럼 들리는 이발소와 커트실, 바버샵은 명칭뿐만 아니라 정체성도 제각각이다. 남성이 기른 머리카락을 깎는다는 총론은 똑같을지라도 '어떻게'라는 각론으로 들어가게 되면 양상이 판이하다. 예를 간단히 들자면, 이발소는 주로 가위로 깎는 데 반해 커트실과 바버샵은 전기바리캉이 주무기다. 이발소 주인은 거진 남잔데 커트실은 남자보다 여자가 주인인 비율이 높다. 기른 머리카락을 깎아내는 건 다 똑같은데 요금은 바버샵이 제일 비싸고 다음이 이발소, 제일 저렴하기로는 커트실이다. 나는 시내 중심가의 한 바버샵 커트 요금이 일반 커트실보다 5배라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드는 손품의 경제적 가치라지만 내가 보기엔 거기서 거기다. 금손을 타고난 것도 아닌데. 아무튼 다시 돌아와, 커트실 속에서 나는 어떠한 잡념도 품을 새 없이 염색약을 타 바르고 시간에 맞춰 머리를 감겨 닦아 주기를 되풀이한다.

그러다 쑤시는 허리를 통통 두들기며 2층인 점방 창문 밖 풍경을 바라보는데, 한때 내가 이 동네엘 자주 드나들어 제법 잘 알고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대학교 1학년 때인 1991년, 전철이 달랑 1호선뿐이던 당시 부산에서 부산대학교-주례동은 77번 버스를 타야 오갈 수 있었고 그 노선은 여전히 그대로 운행 중이다. 내 동네도 아닌 주례동을 1학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이태에 걸쳐 77번 버스로 뻔질나게 다녔다. 주로 늦은 밤 집까지 바래다준다는 명분으로 동승을 했지만 실은 학교에서 미진했던 데이트의 연장이었다.

버스를 내려 왕복 10차선 대로를 가로질러서 굴다리 같은 곳을 지나 낮은 언덕배기를 조금 올라가면 그니 아파트가 있었다. 당시에 딱 봐도 신축은 아닌 듯했으니 30년이 지난 지금 그 자리에 그 이름으로 서있을지는 아니 가봐서 모르겠다. 다만 그 아파트 옹벽이 불현듯 떠오르면 예고도, 통보도 없이 맞닥뜨린 일방적인 이별을 번복시켜 보고자 방한을 채 차리지도 못하고 슬리퍼만 질질 끌고 옹벽 밑에서 그니 만나기만을 새벽부터 하염없이 기다리던 1993년 한겨울 어느 날 내 미련한 모습도 같이 떠올라 헛웃음이 피식 나온다.

벌써 30년이나 지난 옛날 일이 되어 버렸다. 같은 과 선배라는 교사인 남편과 그니 역시 과학 교사로 경기도 어디쯤에서 잘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하도 독실해 방학만 됐다 하면 예루살렘 통곡의 벽을 찾아가 구원의 통곡을 주야장천 해대는 유대교 신자라는 옛날 그니를 떠올리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문도 역시 들었다. 뭐가 됐든 불행보다는 행복 쪽으로 부등호가 기울어진 소문은 들어서 나쁠 게 없다.

만약에 옛날 친정집 근처 한 커트실에서 검은색 미용 에이프런을 두르고 양손엔 방수 토씨를 낀 채로 열심히 염색약을 바르고 머리를 감기는, 탈모를 은폐시키려고 뽀글이 가발까지 덮어 쓴 나를 본다면 그니는 뭐라고 할까. 하고많은 동네 중에 왜 하필이면 옛날 자기 동네냐고 타박할까, 아직도 옛 정이 남았냐며 언제 적 일인데 아직도 우려먹냐고 비아냥댈까. 아니면 도대체 누구신데 대학교 다닐 때 자기 동선이며 친정집까지 꿰뚫고 있냐며 스토커로 신고할까.

잡생각일랑 전혀 안 하고 오로지 일에만 열중했다는 증언은 이것으로 이 글을 읽는 당신들에게 거짓말임이 들통 나 버렸다.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데 부산대학교 방향인 77번 버스가 대학생인 듯 한 한 무리의 젊은이들을 태우고 막 떠났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글 제목으로 그럴싸한 것 같다.


KakaoTalk_20210131_210917257.jpg


작가의 이전글가발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