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가게 올해 설날 연휴 대목은 10일까지였다. 설날 전날, 그러니까 연휴가 시작되는 2월 11일까지는 손님들로 붐비리라 예상했는데 한산해도 너무 한산하니 말이다. 오전에 잠깐 손님 몇이 꼬리를 물고 들어온 뒤로 한참 동안 드문드문했다.
곁방에서 점심으로 시킨 중국집 잡채밥을 여유작작하게 먹고 이빨까지 느긋하게 쑤시다 나오니 한 손님 목에 두른 커트보를 거두며 가게 원장은 염색 바를 준비를 하라고 했다.(명절 대목 도와달라고 연락이 왔었다. 이래 뵈도 이 방면에서 제법 한몫 거들 줄 아는 어중잽이로 폭풍 성장 중이다.)
흑색 염색약을 열심히 바르고 있는데 가게 원장이 자식은 몇 명이냐고 물었다. 명절 앞에까지 일하러 나온 땜빵 직원한테 가족 얘기를 빌미로 덕담 생색을 내려는 속셈 같았다.
- 딸 둘입니다.
- 큰 애는 몇 살?
- 올해 대학교 2학년 됩니다.
- 작은 애는?
- 중2 올라갑니다.
의자에 앉아서 둘 사이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염색 손님이 한 마디 거든다.
- 올해 몇 살인데요?
- 쥐띱니다.
- 쥐띠면 그래서 몇 살이냐고요?
- 72년생입니다.
가게 원장이
- 올해 오십이우?
하길래 얼른,
- 만으로는 마흔 여덟인데요.
했더니 이번엔 손님이
- 마스크 때문인가. 나는 암만 봐도 마흔 두셋으로밖엔 안 봤는데.
갸우뚱하더라.
속으로 이게 다 가발 덕이로구나 쾌재를 불렀고 눌러쓴 가발 역시 내 신체발부나 다름없으니 앞으로는 더욱 아껴야겠다고 마음 다져 먹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너무도 쉽사리 '5'라는 숫자를 꺼내든 가게 원장이 괜스레 원망스러웠다. 그 양반 입장에서야 한국 나이로 대는 게 지극히 보편타당한 언사인데도.
작년부터 누가 나이를 물어보면 띠만 대거나(쥐띱니다) 생년에 띠를 붙여 대충 얼버무린다(72년 쥐띱니다). 이도 저도 아니면 한 살을 더 보태는 한국나이 대신 극구 만 나이로 대답한다. 이를테면 '2021년 2월 현재, 생일이 안 지났으니 만으로는 마흔 여덟입니다' 식으로.
처음부터 나이 밝히는 것에 민감해 하진 않았다. 청춘이 그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이십 대에서 삼십 대 깔딱고개를 넘어갈 때도, 파란만장하게 싸질러 놨던 삼십 대를 뒤치다꺼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사십 대에도 나이란 내가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영역, 그저 무정한 세월 흘러가는 대로 바라만 볼 뿐인 철저하게 수동적이고 방관자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헌데 속절없는 인생이긴 해도 과연 나는 내 인생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누려보긴 했냐는 자문에 묵묵부답하는 나를 불현듯 발견했다. 헐거운 주머니 사정이 본질이 아니다. 돈이 없으니 하고 싶어도 못 한다는 핑계가 일견 합리적일 수 있지만 정작 무시무시한 문제는 살기 위해서 먹는 게 아니라 먹기 위해 산다는 식의 지독시리 본말이 전도된 사고가 내 머릿속을 온통 지배했다는 데 있다.
돈 버는 행위를 당장 그만둘 수는 없다. 의식주 해결책이기도 하거니와 기본적이고 규칙적인 경제 활동은 사람의 생체 리듬을 늘 정(正)의 상태로 유지시키기 때문에 가급적 오래오래 일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소견이다. 대신 욕심 부리지 않는다. 경제 활동은 시간의 경계를 지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딱 정해진 범위 안에서만 하고 끝낼 것. 남성 커트점 운영이라는 당면 과제를 설정하고 이를 위해 매진하고 있는 나는 땜빵 일도 마다않는 지금부터 그 취지에 부합하고자 내 몸을 설정하려고 애쓴다. 출퇴근 시간은 칼 같이, 돈을 더 준대도 오버 타임은 없을 것, 일을 마치면 낮에 하던 일만 빼고 뭐든 바지런을 떨기 따위.
자, 하루 스물 네 시간, 한 달 삼십 일, 일 년 삼백육십오 일 가운데 일에 투자하는 시간을 빼고 남는 시간은 온전히 내 꺼다. 아까도 피력했듯이 시간의 경계를 확실하게 지었기 때문에 남는 시간을 파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그 시간에 무엇으로 맹렬하게 즐길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화두다. '제대로 인생 즐기'는 방법을 찾아가는 행복한 탐색이 내 눈 앞에 바야흐로 펼쳐질 것이다.
그러니 아, 흘러간 세월이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는 거다. 또 남은 내 생은 어떻고. 안타까우리만치 귀하고 소중할밖에. 일 분 일 초조차 허투루 써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은 굳이 나이를 한 살 더 먹게 대는 걸 아둔하고 미련한 짓으로 치부하기에 이르렀다. 한 살이라도 덜 대는 나는 내가 바라는 걸 할 수 있는 한 살, 일 년이라는 시간을 더 버는 셈이다. 앞으로도 계속 나는 띠를 대거나 생년에 띠를 대고, 이도 저도 아니면 만 나이를 댈 테다.
『시마』 시리즈, 『황혼유성군』 시리즈로 유명한 만화가 히로카네 켄시는 그가 오십 대쯤인 2000년대 초반에(1947년 생) 『중년이 행복해지는 여섯가지 비결』(2003, 나들목)이라는 에세이집을 내고 오십 줄부터가 새로 시작하는 반의 인생 곧 '후반생'이고 그 오십 대가 행복해지는 여섯 가지 결심을 남겼다. 요점만 간단히 적자면,
첫 번째, '작은 욕심'을 부린다. 살아가기에 필요한 의식주는 이미 충분히 갖추었기에 큰 욕심은 필요하지 않다. 가까운 곳에 있는 행복을 천천히 음미하자.
두 번째, 좋지 않은 과거는 깨끗하게 잊어버린다. 지금 이 순간을 정말로 즐거운 때라고 생각하려면 과거 따위는 산뜻하게 잊는 것이 좋다.
세 번째, 즐거운 것은 '진심으로' 즐긴다.
네 번째, 방황하고 있다면 한 발짝 앞으로 나간다. 지금까지는 자주 방황하는 인생이었다. 그 이유는 내 이익과 안전을 우선하기 위해 모든 것을 저울질했기 때문이다. 잃는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했던 우리는 후반생에는 잃어버릴 염려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다섯 번째, 그 존재가 혈육이어도 좋고 타인이어도 좋으니, 자신만 아니면 누구든,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존재를 마음에 둔다.
여섯 번째, 후반생이 행복해지려면 '인생은 일장춘몽'이라는 대범하고 느긋한 체념이 있어야 한다.
동기 한 녀석한테 유일하게 유지하는 밴드 속 채팅 창에다가 명절 인사를 남겼더랬다. 그 내용인즉 오십 줄에 접어드는 우리가 인생을 지금보다 더 효율적으로 즐기자면 무엇보다 우선 안 아파야 하니 건강, 건강, 또 건강하라는 덕담이었는데 그 말 꺼내려고 괴발개발 참 많이도 주절거렸다. 이 글을 읽는 분들 모두 철 바늘로 꽂아도 피 한 방울 안 나는 금강불괴의 건강 유지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