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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금 만기

by 김대일

인터넷 은행 '26주 적금'을 완납해 내일이 만기일이다. 처음 약정한 금액만큼 매주 증액시켜 나가는 적금으로 1주차 입금액을 2,000원으로 약정했으니까 4,000원, 6,000원, 8,000원 식으로 매주 2,000원씩 늘려 나가다가 52,000원으로 마지막 26주를 마무리지었다. 그렇게 해서 모인 원금만 702,000원이다.

1주차 입금액을 높게 설정하면 증액분도 따라 커질 테지만 나로서는 욕심 부릴 형편이 못 되는데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늘어나는 입금액 맞추는 데만도 쎄가 빠질 지경이었다. 버는 돈은 변변찮은데 잔고 축내는 건 일도 아니어서 푼돈이라 여길 것도 내겐 크게 다가왔다. 적금이라는 게 여윳돈 여투어 모갯돈 마련하려는 의지의 산물이라고 하면 근천스럽게 이 주머니에서 저 주머니로 옮길 뿐인, 설령 주머닛돈이 쌈짓돈이라고 해도 어떻게든 안 까먹고 묶어두겠다는 고육책으로 적금을 유용하는 나도 나름의 고충은 있겠다.

모으기보다 써제껴야 직성이 풀리는 몹쓸 습성이 몸에 밴 탓에 목돈이란 걸 만져본 적 없다. 잔고 비면 남 돈 끌어다 메우는 걸 대수롭잖게 여겼고 윗돌 빼서 아랫돌 괴고 아랫돌 빼서 윗돌 괴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에 깔려 가산을 탕진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러다가는 다 죽게 생겼다며 마누라가 곳간 열쇠를 틀어쥔 뒤로는 돈 나올 구멍이 원천봉쇄됐다. 꼭 써야 한다면 용처를 분명히 알리고 현금을 타다 쓰거나 마누라 신용카드를 빌려다 쓴다. 제 주머니 비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던 위인이 십 년 넘도록 쭈그렁바가지 신세를 못 면해도 그런대로 신간이 편하다. 버는 돈이 변변찮으니 쓸 일도 따라 없어졌고 덕택에 씀씀이가 확 줄었다. 마누라가 봐서 용처가 불명확하고 불요불급하다고 판단되면 알아서 더는 말 안 보탠다. 서운할 법도 하지만 가진 돈의 무게가 가벼우면 책임질 일도 줄어 되레 홀가분하다.

간혹 시급을 요하는데도 옹색한 티만 내다 사람 구실 못한 자괴감으로 속이 문드러질라치면 수중에 비상금이 늘 절실했던 것도 사실이다. 애옥한 형편에 무슨 뾰족한 수가 생길까만은 용돈이라고 받아서는 갖은 궁상 다 떨면서 애끼고 꿍쳐가매 몰래 나만의 자산을 만들기로 마음 먹었던 차에 시작한 적금이다. 그러니 그간 애환을 웃고 넘길 수만은 없다. 그렇게 꾸역꾸역 26주를 견뎠다. 돈에 관한 한 강단이라고는 찜 쪄 먹고 없는 내가 그 긴 시간을 딴마음 한 번 안 품고 일로매진했다는 건 오래 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무덤에서 환생해 튀어나올 일이다. 남들이 보면 코웃음 칠 소득세 뗀 세후이자 418원이 내게는 418만 원보다 더 소중한 의미로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렇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나란 녀석도 고삐 쥐고 소 몰듯 돈을 다룰 줄 알게 됐다는 자신감을 되찾아 가는 중이다. 돈이 내 목을 쥐고 흔들던 형국이 슬슬 역전되는 기분은 9회말 2사 만루에서 역전 홈런을 친 것만큼 황홀하고 뿌듯하다.

알바 해서 벌고 매달 제 계좌로 송금하는 할아버지 용돈까지 합하면 은행 잔고로는 아비보다 훨씬 부자인 큰딸은 얄미워서 빼고 마라탕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막내 녀석만 따로 불러 내 거하게 한 턱 쏠 작정이다. 돈 걱정일랑 말고 먹고 싶은 토핑 양껏 얹어 먹으라고 호기 한 번 부려 볼란다. 마누라? 돈 실렸다는 소리만 들려도 전액 압순데 내 무덤을 왜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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