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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Dec 24. 2021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누군가가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그러면 부리려는 그 '수작'의 정체가 미치도록 궁금하다. 괜히 꺼냈다가 재미없다는 구박이나 들을까 지레 겁을 내 차마 발설하지 못하는 거라면 나한테만큼은 염려 붙들어 매시라. 쏟아내는 말잔치에 재미까지 덤으로 얹어지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겠지만 고명 없다고 냉면 맛 없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 없다. 솔개 어물전 돌 듯 내가 눈독 들이고 귀담아 들으려는 건 말들이 모이고 쌓여 완결된 짜임새를 갖춘 이야기, '사연'이다. 

   핑계 없는 무덤 없듯이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공술로 사람을 후려 술김에 자진 실토케 하든 잘한다 잘한다 알랑방귀 뀌며 어르든 일단 닫힌 입이 터지는 순간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흥미진진, 기상천외, 스펙터클, 드라마틱하기 이를 데 없는 한 인간의 비화가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지곤 한다. 말이라는 게 발화되는 순간 휘발되는 고약한 성질이 있어서 나는 대중없이 재잘대는 상대방의 말을 얼개로 단단히 엮어 보겠다고 핏줄 선 두 눈은 쉴 새 없이 떠드는 입을 집중하고 쫑긋 세운 두 귀는 토씨 하나라도 놓칠세라 주워담기 바쁘고 연신 스마트폰 메모장을 두드려대는 두 손은 속기사를 방불케 한다. 그렇게 쓸 만한 사연 하나쯤 건지는 날에는 탈탈 턴 술값이 그닥 아깝지 않다. 

   사연을 수집하기에 연말인 요즘이 딱 적기다. 이 시기에는 한 해의 노고를 위로한답시고 작당해 벌이는 술판이 어디 하나둘인가. 격조한 탓에 서먹해진 감정의 골을 메우고자 들이켠 대작들로 분위기는 얼큰해지고 굳이 묻지 않아도 알아서들 이야기 보따리가 술술 풀어낸다. 그럴 때는 그저 귀담아 듣고 맞장구를 쳐 주면 된다. 물론 손에 든 스마트폰는 불이 나지만. 역병의 기세가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던 작년 연말은 꼼짝없이 집콕 신세여서 최악이었다. 두어 달 전부터 방역이 풀려 밤늦도록 취객들이 활보하자 올 연말은 작년과는 사뭇 다를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일상은 다시 멈춰 섰고 방구석에서 부랄이나 긁다 새해를 맞을 판이다. 좀 암담하다. 연말을 슬기롭게 나는 방법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장삼이사들의 말, 말, 말 속엔 의외성이 숨어 있다. 평범 속의 비범이랄까. 연말이면 그 뜻밖의 즐거움으로 지루한 일상을 각별하게 변모시키려는 내 시도가 해를 넘겨 연거푸 수포로 돌아갈 지경이다. 그렇다고 왜자기고 싶어 안달이 난, 기막힌 사연을 꽁꽁 품은 장삼이사들을 찾아 다니며 그럴듯한 이야기로 윤문하는 작업을 그만둘 생각은 추호도 없다. 비록 연말 특수는 포기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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