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代身

by 김대일

'라곰(lagom)'은 '적당한, 알맞은' 따위로 번역되는 스웨덴 단어다. 8~11세기 뿔 모양 잔에다 술을 돌려 마시던 바이킹 풍습에서 유래했는데 한 사람이 너무 마시거나 덜 마시게 될 때 뒷사람이 감당할 곤혹스러움을 예상해 눈치껏, 적당히 마시되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자기 만족도 같이 느낄 이타심과 이기심의 경계선상에서 줄타기를 하는 듯한 심리적 균형 맞추기로써 스웨덴인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태를 이해하는 열쇳말이자 스웨덴의 병리 현상을 해석하는 단초라고 했다. 즉, 자신은 물론 상대방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짧고 간결한 말투, 논쟁적 소재에 대한 대화를 기피하는 절제와 겸양, 배려를 중시하는 라곰 정신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북유럽식 삶의 철학을 나타내는 반면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자칫 무심함이나 냉정함으로 비춰지기 십상인 ‘사람 간의 거리 두기’가 지독한 외로움의 근본 원인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그래서 스웨덴은 행복한가>, 한겨레신문, 2017.10.09.)

고故 신영복 선생이 해외기행 갔을 때 일이다. 스웨덴 기행을 끝내고 그 감상을 피력해야 하는데 선생이 스웨덴에서 받은 인상이 의외로 착잡해서 어려웠다고 밝힌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아내와의 다툼에 대하여 동료에게 이야기를 꺼내면 이야기를 채 잇기도 전에 정중하게 그 문제는 전문 상담자와 상담하라고 권유하면서 이야기를 잘라 버립니다. 물론 전문 상담자는 그의 동료보다 훨씬 더 합리적인 해결 방법을 제시해 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삭막한 풍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훌륭한 시설을 갖춘 노인 복지관의 할머니는 생면부지의 여행자인 나를 붙잡고 놓아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그리워하는 노년의 생활은 무척 삭막해 보였습니다. 물론 복지관에 상담 프로그램이 실시되고 있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내 훌륭한 시설이란 무엇인가 반문해 보았습니다. 편리하게 설치되어 있는 첨단 시설들이 오히려 비정한 모습으로 내게 비쳐 오는 것이었습니다.(신영복 유고,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175~176쪽, 돌베개)

선생이 스웨덴에서 느낀 삭막함의 정체는 아픔을 함께 공유하려 하지 않으려는 비정한 거리두기, 라곰의 어두운 이면은 아니었을까. ​스웨덴 성인의 40%가 지독한 외로움을 호소하고 우울증 치료제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비하며, 인구의 절반이 혼자(1인 가구) 살아가고 4명 중 1명이 홀로 죽어간다. 자기 감정을 드러낼 수도, 가족과 친구의 어깨를 빌릴 수도 없는 처지에서 그나마 기댈 곳은 시스템일는지 모른다. 라곰 문화가 종종 스웨덴인의 ‘복지 의존도’ 증가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이유란다. 칼럼 제목처럼 그래서 스웨덴은 행복할까.

북유럽식 사회보장의 이면에 드리워진 냉담함으로 무연고 사망자 수가 4년 새 58% 이상 는 우리의 열악한 현실을 위로할 생각은 없다. 사람 사이에 넘지 못할 경계선을 그어 배려라는 미명 하에 철저하게 거리를 둔 채 무관심과 수수방관을 일삼는 우리의 인간관계 또한 정상적일 리 없다. 내가 대학에 들어갈 무렵인 1990년대 초반,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는 어김없이 냉면사발이 등장했다. 좀 과하면 세수대야까지 들고 나와 술이란 술은 다 담았다. 그러고는 신입생들한테 돌아가면서 마시게 했다 바이킹처럼. 자기 다음이 술을 입에도 못 대는 녀석이면 앞에서 미리 사발째 대신 비워버렸다. 객기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때는 그랬다. 그렇게 하는 게 술을 불편하게 여기는 동기를 위한 배려인 줄 알았다. '어떤 대상의 자리나 구실을 바꾸어서 새로 맡거나 그렇게 새로 맡은 대상'을 뜻하는 '대신代身'은 타인을 위한 선한 오지랖이면서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결기 같은 거였다. 그 시절을 아슴푸레 떠올리는 꼰대 기질 탓에 라곰이란 단어가 자꾸만 목구멍에서 턱턱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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