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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방식

by 김대일

4년 전 봄에 부산대학교 사회적기업학과 대학원에 원서를 넣었다 보기 좋게 떨어졌다. 당시 필수 제출서류로는 자기소개서, 수학계획서, 에세이 2편이었다. 수학계획서, 에세이는 어디다 내버렸는지 온데간데없고 자기소개서만 달랑 남았을 뿐이다. 자기소개서는 지원할 곳의 구미에 맞게 윤색하는 게 다반사인데 그때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대학원에 낼 내용치고는 어째 적나라했다. 이휘재를 유명인으로 등극시킨 <인생극장> 의 '만약에 내가' 식 가정화법이 자기소개서로는 뜨악하기 이를 데 없지만 나라는 사람을 여과없이 소개하기에 이만큼 효과적인 자기소개서도 없지 싶었다. 너무 솔직하면 손해보기 십상인 세상에 ​내가 심사관이라도 도입부만으로 싹수가 틀려먹은 줄 알겠지만. ​

이 학교 91학번이다. 자기가 원해서 들어간 국어국문학관데 1학기 채 지나기도 전에 공부랑 담을 쌓았다. 그러니 학과 성적은 형편없고 변명의 여지랄 게 없다. 어쭙잖게 핑계를 대자면 재밌는 과목을 교수들이 너무 재미없게 가르쳐서 중이 싫어 절을 떠났다라고 하면 견강부회가 너무 심한가. 아무튼 그냥 졸업하긴 뭣해서 ROTC를 지원해 1995년 졸업과 동시에 초급장교로 입대해 강원도 원통 오지에서 된통 욕을 봤다. 막차나 다름없는 ROTC 장교를 우대하는 당시 사회 분위기에 기대어 전역 이후로 꽃길만 걸을 줄 알았다. 1997년 7월 골라서 들어간 아무개 생명보험회사의 본사 직원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지만 곧바로 IMF 유탄을 맞았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본사 근무 중인 공채 신입사원들을 건물 옥상에 집합시켜 제비뽑기로 퇴사자를 결정하는 살풍경이 연출되던 때였다. 입사한 지 얼마나 됐다고 퇴사인가 자존심이 상해 무조건 살아남겠다는 오기를 부렸지만 그것만이 정답이었을지 돌이켜 보면 생각이 많아진다. 재깍 퇴사됐더라면 부산으로 내려갔을 테고, 어수선한 시국에 뭘로 먹고 살지 위기감을 느낀 같은 과 남자 동기들의 교육대학원 진학 러시를 바라보며 이휘재가 그랬듯 ‘그래 결정했어!’라고 외쳤다면 지금쯤 아마 어느 고등학교 기간제 국어교사쯤 되어 있을지 모를 일이다.(이하 생략)

옥상 제비뽑기로 찍혀 퇴사 후 곧장 낙향했다면, 그길로 교사 되는 수순을 순순히 밟았다면 아주 딴판인 인생이 전개되고 있을지 모른다. 운 좋게 정교사가 발탁돼 같은 정교사인 여자와 결혼해 남들 부러워하는 부부 교사로 평탄하고 달달하게 인생을 구가하고 있거나 부평초마냥 이 학교 저 학교를 전전하다 혼기까지 놓친 기간제 교사로 덧없이 낫살만 먹은 볼썽사나운 꼴로 전락하거나 말이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어째 좀 밋밋하긴 하다. 그보다는 돼지목에 진주목걸이같이 꼴같잖아 민망스럽다.

교사 직업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들, 예컨대 훌륭한 품성, 투철한 사명감, 모범적 태도, 학생에 대한 애정 따위와 나를 겹쳐놓고 보면 아귀 맞는 구석이라고는 한 개도 없어 설령 교단에서 호령한다고 해도 과연 평탄했을지 대단히 미심쩍다. 기복이 심하고 싫증을 잘 내는 성정 탓에 천직이라고 해서 그리 투철할 것 같지 않고 사명감이랄 게 없으니 타의 모범이 될 리 없으며 결정적으로 아이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므로 없는 애정이 생길 리 만무하다. 그저 생계의 한 방편쯤으로 여길 뿐이니 먹고 사는 데야 지장이 없겠지만 사는 재미랄 건 별로 못 느끼면서 꾸역꾸역 살지 모른다.

누군들 인생을 어드벤처로 살고 싶겠는가마는 엉덩이 근질근질하는 천성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무미건조함을 극도로 꺼려해(교사로 사는 이들이 들으면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덧붙이는 바, 교사의 삶이 무미건조하다는 게 아니고 나라면 그리 느낄 것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편협한 의미니 너무 괘념치 마시라) 소싯적부터 좌충우돌하더니 기어이 뒤웅박 팔자를 못 면하게 된 건 전적으로 자초한 바다. 하지만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꺼내면 자서전 서너 권은 기본일 것 같은 애환 많은 역정이라는 게 인생을 사는 재미라는 측면으로 보면 아주 망가진 게 아니다. 이제 겨우 반백 년 산 주제에 할 말이 넘칠 정도에 이후 행로에서 겪을 수만가지 얘깃거리까지 합하면 그 모든 걸 갈무리하기 전까지는 억울해서라도 쉽게 못 죽을 터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고정된 틀에 나를 가두느니 흥미진진한 뭔가에 곁눈질하면서 옆길로 자꾸 새고 싶다. 물론 나잇살 맞게 적당히 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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