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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는 일요일(31)

by 김대일

(1988년 정지용이 해금되고 시인의 시가 가수 이동원과 성악가 박인수에 의해 노래로 불렸지만 그 당시엔 지금처럼 대중적이지 않았다. 고로 시든 노래든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는 얘기. 시는 암송하지 못하면서 희한하게도 노랫말은 흥얼거릴 줄 알아서 그 덕을 크게 봤다. 점수로 환산하면, 내 기억에 5점?

1990년 초겨울에 치뤄진 대입학력고사 국어 시험에 대뜸 <향수>가 지문으로 등장해 괄호 쳐놓은 곳에 들어갈 알맞은 시어를 써넣으라는 주관식 문제가 나왔다. 학력고사 사상 최고 난이도를 자랑했다는 그 해 수학 문제들 만큼이나 그 국어 문제도 수험생들을 뜨악하게 만들었겠지만 나로선 이게 웬 떡이냐며 넙죽 잘도 받아먹었고 그 점수가 당락을 크게 결정지었을 거라고 지금껏 착각하고 산다.

시를 읊으면서 제일 부러운 건 그리움의 정서를 증폭시키는 시어들이 만발했던 시인의 고향이었다. 향수병은 아무데서나 나는 게 아니다. 고향다워야 그리운 법이니까. 설이 목전이지만 염병이 어김없이 고향 갈 발목을 잡을 태세다. 그런 이들에게 바치는 위로의 시다. 잘났건 못났건 고향 붙들고 사는 사람으로서 말이다.)​

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활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러치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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