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정지용이 해금되고 시인의 시가 가수 이동원과 성악가 박인수에 의해 노래로 불렸지만 그 당시엔 지금처럼 대중적이지 않았다. 고로 시든 노래든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는 얘기. 시는 암송하지 못하면서 희한하게도 노랫말은 흥얼거릴 줄 알아서 그 덕을 크게 봤다. 점수로 환산하면, 내 기억에 5점?
1990년 초겨울에 치뤄진 대입학력고사 국어 시험에 대뜸 <향수>가 지문으로 등장해 괄호 쳐놓은 곳에 들어갈 알맞은 시어를 써넣으라는 주관식 문제가 나왔다. 학력고사 사상 최고 난이도를 자랑했다는 그 해 수학 문제들 만큼이나 그 국어 문제도 수험생들을 뜨악하게 만들었겠지만 나로선 이게 웬 떡이냐며 넙죽 잘도 받아먹었고 그 점수가 당락을 크게 결정지었을 거라고 지금껏 착각하고 산다.
시를 읊으면서 제일 부러운 건 그리움의 정서를 증폭시키는 시어들이 만발했던 시인의 고향이었다. 향수병은 아무데서나 나는 게 아니다. 고향다워야 그리운 법이니까. 설이 목전이지만 염병이 어김없이 고향 갈 발목을 잡을 태세다. 그런 이들에게 바치는 위로의 시다. 잘났건 못났건 고향 붙들고 사는 사람으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