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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Feb 11. 2022

고수가 등장하자 고수가 떠올랐다

   <유 퀴즈 온 더 블럭> '고수 특집'에 배우 고수가 나왔다. 근자에 홍보할 신작이 없는데도 미모 하나만은 다비드 상을 방불케 하는 고수의 등장이 진행을 맡은 유재석, 조세호도 생뚱맞았는가 보더라. '고수 특집'이고 해서 이름 핑계 삼아 아니면 말고 식 섭외가 들어갔는데 평소에 좋아하는 프로그램이라 20분만에 출연을 결정했다는 그가 소탈해 보였고 덕분에 미남자의 인생 이야기를 겉핥기로나마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배우 고수 말고 '고수 특집'에 어떤 고수들이 나오나 봤더니 재야의 무림 고수, 45년 간 설악산을 오른 지게꾼, SNS 은둔 작가 등 다채로웠다. 우리가 눈여겨보질 않아서 그렇지 우리 주변에는 무수한 고수들이 암약하고 있다. 나만 해도 천금같이 무겁던 말문이 터지자마자 그전까지 술판을 주무르던 떠벌이를 일거에 제압하는 고수를 목격한 뒤 그 경이로움에 경도되어 글로 남긴 바 있었다.

   

   동네 헬스장 회원들 모임이라면서 막걸리 술판에 불려간 적이 있었다. 안식구끼리야 막역한 사이라고 남편들까지 덩달아 친한 척 하기가 뭣해 데면데면할 뿐인데도 두서너 살 터울 진 게 큰 벼슬이라도 된 양 걸핏하면 형 노릇 상사 노릇 하려고 드는 아내 친구 남편(이하 '아친남')이 그날도 편협한 내 대인관계를 질타하면서 참석을 강권한 것이다.

   근처 빈대떡 가게에는 부부 두 쌍이 막걸리 잔을 두고 희희낙락거리는 중이었다. 아친남은 예의 능글맞은 눈웃음을 흘리며 쉼없이 수다와 잔망을 작렬시키면서도 행여 대화의 주도권을 뺏길라치면 일생일대의 큰 봉변이나 당한 듯이 어쩔 줄 몰라 하더니 남이 하는 얘기에 감 놔라 대추 놔라 불쑥불쑥 참견을 일삼으면서 원상회복을 꾀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꼴 보고 있자니 내가 다 민망할 지경이었다.

   ​기울어진 운동장 같은 술자리에서 전혀 초면인 옆 자리 남자의 존재감은 미미함 그 자체였다. 왜 있잖은가. 파할 때는 똑같이 지갑을 열지만 술판에서는 더부살이 눈칫밥 먹듯 옴츠리고 앉아 어색한 미소만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할 뿐인 부류 말이다. 이런 자리 이골이 났다는 듯 무덤덤한 표정만 짓고 묻는 말에 단답형으로 답할 뿐이었다. 방향을 잃은 떠벌이의 아밀라아제 유탄을 염려해 손바닥으로 막걸리 잔을 연신 가리는 외에 잔몸짓이라곤 거의 없는 절제와 정숙의 소유자. 북새통 속에서 옛 동지를 만난 느낌이 과연 이럴까!

   술잔이 몇 순배 돌고 난 다음이었지 아마. 갑자기 그의 입술이 실룩실룩하더니 봇물 터지듯 씨부렁대기 시작했다. 야살스러운 아친남을 응징하기 위해서인지 편향된 술판 분위기를 쇄신하려는 배려인지는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감천항에 가야 겨우 러시아인을 보던 시절에 러시아 뱃놈들한테 특히 인기를 끌던 선술집이 있었어. 거기서 내 친구가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옆 테이블 로스케 녀석이 되게 친한 척 굴더래. 둘 다 전작이 있었던데다 반죽까지 좋았는지 말도 안 통하면서 둘이 잘도 주거니받거니 잔을 부딪히면서 웃고 떠들었다는 거야. 한참 그렇게 둘이서 잘 놀던 둘이 갑자기 서로 멱살을 잡고 주먹다짐까지 하기에 이르렀지. 어떻게 됐냐고? 그길로 유치장에서 밤을 꼴딱 세웠지 뭐. 암만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고 이상해서 내가 그 친구한테 물었어. 말도 안 통하면서 싸울 건 뭐냐고. 친구가 뭐라는 줄 알어?

'보드카 퍼마시고 나니까 말끝마다 개시키소시키하는 로스케 말이 귀에 착착 감기더니 마구 알아먹겠더라고. 이말저말 막 주워섬기는 로스케 녀석 말을 들으니 영 눈꼴시러운 거야. 그래서 내가 충고해줬지. 네 녀석 이념이 나랑 영 안 맞아. 그러니 생각 고쳐 먹으라고 말이야. 그랬더니 아 글쎄 내 갈 길 가겠다는데 왜 지적질이냐고 녀석이 덤비는 거야. 이런 돼먹잖은 로스케 녀석, 홧김에 선빵 날리다가 그만.'”

   아친남의 입은 봉해진 지 이미 오래됐다. 이후로 말문 활짝 터진 옆 자리 남자를 막을 자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나는 거짓말 좀 보태 이명 탓에 그날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절대고수는 역시 딴 데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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