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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Feb 12. 2022

슬기롭게 <전원일기> 보기

   오래 전에 종영된 드라마만 골라서 일년 삼백육십오일 주야장천 틀어주는 케이블 채널, 모친은 다른 건 안중에도 없고 <전원일기>만 정주행하신다. 공교롭게도 주간보호센터에서 귀가하는 저녁 무렵 TV를 틀면 한 채널에선 전원일기 초기 3~400회차, 다른 데선 중기인 7~800회차 방영분이 4~6회씩 연속으로 나온다. 리모컨을 쥐고 이 채널 저 채널 번갈아가며 하루치 방송분을 죄다 봐야지만이 직성이 풀리신다. 잠자리에 드신 걸 확인하고서야 편히 잠을 청하는 나는 모친 곁을 지키다 덩달아 그 드라마에 홀딱 빠지고 말았고.

   드라마를 원래 좋아라하지 않을 뿐더러 세간의 화제가 되거나 구미에 맞는 드라마 내용이 정 궁금하면 엑기스만 정리한 요약본을 유투브로 찾아보다 마는 게 나인데 종영된 지 20년이 다 된, 시쳇말로 힙하지도 핫하지도 않은 농촌을 배경으로 한 구닥다리 드라마에 넋을 놓고 조곤조곤 섭렵하는 모양새가 내가 봐도 별쭝맞다. 한창 상종가를 달릴 무렵 <전원일기>가 끼친 문화적 영향력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되 그렇다고 열혈 시청자로 시청률에 기여한 적도 없었다. 등장하는 인물군을 피상적으로 아는 체했을 뿐 드라마 속 그들의 구구절절한 사연과 곡절을 알진 못한다. 하여 내 기억 속 <전원일기>는 그저 4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의 가정사를 이야기 축으로 삼고 양촌리 주민들의 파편적 에피소드가 곁들여 드라마 한 회 분량으로 내용이 종결하는 단막극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헌데 모친 따라 엉겁결에 다시보기 정주행을 하면서 그간 내 생각에 큰 착오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일시적이고 우발적이라고 여겼던 에피소드가 기실 과거의 잠재된 내력이 어떤 계기로 해서 재생되어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재현물로 되살아났다는 것, 예를 들어 700회대 어떤 해프닝은 없던 일이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게 아니고 200회대 혹은 300회대에 그 싹이 잉태되어 응축되었다가 세월의 더께가 켜켜이 쌓이고서야 마침내 재등장한 것이라고 한다면 총 1,088부작의 역사성을 간과한 채 국부에만 초점을 맞춘 춘화적 발상으로는 드라마 맥락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음으로 그 재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자 대하와도 같은 드라마가 경이롭고 경외롭기까지 했다. 

   귀동(이계인 분) 아내이자 노마 엄마인 명자(이미지 분)가 갑자기 도망을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나 용식, 일용, 창수, 응삼, 귀동과는 달리 명석(신명철 분)이 노총각 신세를 면치 못한 게 몇 번에 걸친 파경의 아픔에서 비롯되었음을 드라마의 전체 맥락에서 살피지 않는다면 쉽게 파악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응삼(박윤배 분)과 쌍봉댁(이숙 분)의 결혼도 마찬가지다. 응삼이 명석과 짝을 이뤄 노총각 티를 폴폴 풍기는 게 시골 청년 결혼 수난사를 상징화하기 위한 의도된 연출로만 알았는데 드라마 초기인 3~400회대 표현됐던 응삼의 초혼과 이혼의 과정을 직시하지 못한다면 응삼과 명석의 꾀죄죄함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고 응삼과 쌍봉댁의 재혼도 절절하게 다가오지 못했을 것이다. 고로 <전원일기>라는 세계관 속 모든 인물들은 주조연은 물론이고 단역에 이르기까지 견고한 관계망을 구축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드라마를 구축한 것이라고 나는 결론내렸다. 

   그러니 <전원일기>를 보다 조직적으로 꿰고 앉았자면 우리 모친처럼 봐야 한다. 한 손에 리모컨을 장착하고서 동시간대에 방영하는 케이블 채널들을 수시로 옮겨 다녀야 한다. 700회대 에피소드가 끝나 300회대 에피소드를 보면서 그 사건이 왜 일어날 수 밖에 없는지 그 전조, 낌새를 짚어나가는 재미야말로 <전원일기>를 슬기롭게 시청하는 방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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