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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Feb 18. 2022

까스활명수

   가계 계약이 불의의 암초에 걸려 한동안 답보 상태에 빠지고 확진 통보 받은 가족들과 떨어져 지낸 지 한 달 가까이 되다 보니 쌓인 게 많았나 보다. 게다가 금욕적 라이프 스타일을 고수하는 부친이 계신 본가에서 곁방살이를 꽤 하다 보면 생활상은 건전해졌을지 몰라도 수도승에 버금가는 경직성이 부르는 스트레스가 또 설상가상이다. 

   한 잔 걸치지 않으면 돌아버릴 지경에 이르러 하루는 부친 퇴근 전에 막걸리 한 병을 후다닥 목구멍으로 털어넣긴 했는데 돌아버릴 기분을 호전시키기는커녕 텁텁한 끝맛에 입에서 군내 진동해 기분만 되레 더 잡쳤다. 모처럼 만의 알콜기에 기대어 흥뚱항뚱 이완의 풍미를 느껴 볼 작심은 더부룩한 속에서 연신 눈치없이 기어오르는 트림을 따라 가뭇없이 사라졌다.

   술이란 자고로 잔을 부딪쳐야 제맛이요 너 한 잔 나 한 잔 주거니 받으면서 풀어내는 이야기보따리야말로 술자리의 취지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여 좋은 술과 진귀한 음식으로 한 상 거하게 차려놓은들 대작하는 상대가 없다면 그 무슨 맛을 알아 주석의 흥을 느끼리요. 딱한 처지로다. 듬성듬성 성긴 내 인적 그물망을 암만 털어내 봐도 요긴할 때 술추렴할 사람 하나 건지지 못하는 신세란 참으로 적적하고 무료하기 짝이 없으니 말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격조의 녹이 슬기 전에 내 쪽에서 미리미리 유대의 기름칠로 반들반들 윤이 나게 닦아뒀어야 하는 건데 뒤늦게 후회해 봤자 만시지탄일 뿐이다. 

   사람이 그리운 건지 술이 그리운 건지 분간이 잘 안 가긴 하지만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사람이건 술이건 간에 매달려 꽉 막힌 속을 뚫어줄 까스활명수같은 청량함이다. 저녁밥을 고구마와 우유로 때우곤 하시는 부친이 남의 속도 모르고 고구마 한 덩이를 건네신다. 오늘만은 사양하겠습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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