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기술이 필요할까

by 김대일

대화의 기술이 부족한 탓인지 마누라와 긴한 얘기를 나눌라 치면 좋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음장마냥 확 굳어져 버린다. 딱히 표현하기 힘든 무언가가 찰나에 감정의 뇌관을 폭발시키는 공이로 작용해 가볍게 넘기면 될 말도 서로의 말꼬리를 기어이 붙잡고 언성을 높인다. 마누라대로 그간 나한테 켜켜이 쌓인 섭섭함이 폭발한 때문이겠으나 본류가 아닌 지류가 갑자기 대화의 중심으로 뒤바뀌어 분위기를 확 잡아먹는 마누라의 화법에 나대로 진절머리가 나 목소리를 높이는 사달이다.

처가쪽 조카들 중에 유독 마음이 가는 여섯째 처형네 아들내미(작년 1월에 부산 한 대학 체육학과 입학 실기시험 치러 우리집에 머물렀었다. 아쉽게도 떨어지고 전북 전주 아무개 대학 체육학과에 입학했다. 그 녀석에 대해 쓴 글이 <아들 키우는 재미는 어떨까>이다)가 해병대를 자원 입대한다는 소식을 마누라가 전했다. 또 처제 남편, 그러니까 하나뿐인 손아래 동서(처가는 장모님 슬하에 8녀 1남이고 마누라가 일곱째다. 마누라 밑으로 처제와 처남이니 손아래 동서는 하나뿐이다)가 평택에서 가구상을 열어 한창 단골을 잡느라 열일 중이라고도 했다. 기특하고 반가운 소식이 개업 준비로 피로했던 심신을 풀리게 했다. 봐도 데면데면한 사이가 없지는 않지만 처가 식구들이라면 반갑기 그지없다. 형제라곤 남동생 하나뿐인 나로서는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을지언정 의지가지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강하다. 아무튼, 그렇게 이야기를 끝맺으면 딱 훈훈한 가정 드라마의 엔딩 장면이겠는데 마누라는 여세를 몰아 따지듯 꼭 덧붙인다. 왜 자기 집엘 안 가냐고. 하도 안 들르니까 처가 식구들이 나를 식구에서 제명을 시켰다나 어쨌다나. 결혼해 이 날 입때껏 명절 때 처가집에 가자는 말 먼저 꺼낸 적 없다면서 어찌 그리 무심하냐고 따따부따한다. 여기까지야 늘 입버릇하는 마누라의 레퍼토리니 그러려니 귓등으로 흘리겠는데 안 해도 될 다음 말은 나가도 너무 나갔다. 음성(처가를 이르는 말)에 안 가겠다면 문현동(본가를 이르는 말) 갈 일도 없단다. 조건문을 빙자한 타박이 굉장히 부적절해서 빈정이 상했다.

섭섭한 마음은 잘 알겠는데 사실 확인은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 요 몇 년 처가를 못 간 건 맞다. 일부러 안 간 게 아니라 못 간 거다. 특히 이용사로 벌어먹겠다고 마음먹은 뒤로는 자격 취득하랴 주말 알바하랴 짬이 없었다. 게다가 개업을 하면 당분간 일주일에 화요일만 쉴 뿐 내내 가게에 붙어 살아야 할 처지일 텐데 처가행은 안타깝지만 더 요원할 수밖에 없다. 그 사정을 뻔히 잘 아는 마누라가 무가내로 제 섭섭함만 늘어놓는 건 경우가 아닐 뿐더러 설득력도 떨어진다. 모친이 병원에서 퇴원해 본가로 돌아온 지가 몇 달짼데 달랑 한 번 그것도 얼굴만 잠깐 비추고 간 건 잘한 일이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애꿎은 본가, 처가 노친네들을 끌어다 개싸움의 희생양으로 삼을까 두려워 말았다.

제 논에 물 대기 식으로 내 입장만을 변호하는 글일 수밖에 없고 쓰면 쓸수록 누워서 침 뱉는 격이긴 하지만, 가끔(아니 자주) 아주 큰 벽이 마누라와 나 사이에 가로놓여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불신과 불통의 회칠이 발라져 있는 양 공고하기 짝이 없는 그 벽은 서로에 대한 어지간한 배려가 없으면 쉽사리 허물지 못할 난공불락의 장애물이다. 살 맞대고 산 지 스무 해를 훌쩍 넘겼음에도 감정의 해자는 여전히 잔존하고 오히려 더 깊게 파들어가 상대의 접근을 봉쇄하지 말란 법 없다. 싸움의 한 쪽이니 결자해지해야겠지만 나는 자꾸 침묵을 택하려고 한다. 본류가 아닌 지류로 본말을 전도시키는 마누라의 화법이 지긋지긋하거니와 마누라의 성토대로라면 내 행동거지 모두가 인간말짜나 하는 짓이라는 자괴감이 자칫 나도 제어하지 못할 분노로 과표출될까 저어해 나는 말다툼이 더 확전되기 전에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닫아 건다. 『비폭력대화』(마셜 로젠버그/캐서린 한, 한국NVC출판사, 2017)라도 사서 마누라와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마누라가 책 읽는 걸 썩 즐기지 않는 게 문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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