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을 타고 해운대 집으로 가던 길이었다. 센텀시티역을 지날 무렵 지팡이 하나만을 의지한 채 자그마한 소쿠리를 들고 내가 탄 전철 칸 저쪽에서 이쪽으로 참으로 힘겹게 느릿느릿 걸어오는 누추한 행색의 시각 장애인을 봤다. 한눈에 봐도 동냥임을 알 수 있었다. 당시 내겐 마침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수중에 있었는데 일순 그 놈의 결정 장애가 또 발동했다. 지갑에서 꺼내 그가 내민 소쿠리에 넣어야 할지 말지.
일천한 독서력으로 감히 고전을 논한다는 게 어불성설인 줄 알지만, 맹자가 말한 '남에게 차마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 대목은 타인과 공생하는 데 불가결한 인생의 지침으로써 어떤 성인의 고담보다 울림이 크다.
지금 어떤 사람이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면 깜짝 놀라고 측은한 마음이 생길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그 어린아이의 부모와 사귀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며 마을 사람이나 친구들로부터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며, (반대로 어린아이를 구해주지 않았다는) 비난을 싫어해서도 아니다.
이로써 미루어볼진대 측은해 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맹자』공손추 상, 신영복 역)
시각 장애인의 표정에 서린 고단함이 동냥질이라도 하지 않으면 하루하루 살아내기가 버거운 그의 인생을 전면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본다면 차마 모질게 하지 못하는 나는 주저없이 지갑에서 돈을 꺼냈어야 옳다.
하지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우승미의 장편 『날아라 잡상인』(민음사, 2009)에서 대단히 조직적이면서 상술에 능한 인물들로 묘사된 잡상인들처럼 전철 안에서 금전을 요구하는 장애인들 역시 구역과 활동 시간을 엄격히 정한달지 권리금인 양 자릿세를 지불하면서까지 일종의 동냥 사업을 벌인다는 루머를 듣고부터는 꺼림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 루머가 루머로 그치는 게 아니라면 인간에 대한 내 믿음에 거대한 균열이 생길지 모르겠다.
그보다는 가난한 사람에게 물고기 대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빈곤에서 벗어나게 하는 게 나을지 인류학자 제임스 퍼거슨이 역설한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지 말고 물고기 자체를 그것도 현금으로 주라는 제안이 더 효과적일지 양 극단에서 갈지자 횡보를 하는 내 관념이 더 문제였다. 무엇이 그 시각 장애인을 위하는 길인가를 두고 혼자서 속으로 옥신각신하다가 문득 비틀거리면서 다음 칸 문을 여는 그를 발견한다. 그렇게 그를 보내 버리고 만 것이다.
어쩌면 전철 안에서 가끔 목격하는 심상한 풍경일지 모르지만 잔상이 오래 남는다. 그 당시 내가 어떻게 처신하는 게 적절했는지 여전히 판단이 안 서서 더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