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해서 다니는 직장 끽해야 20년

by 김대일

지금은 어엿한 기획사 대표인 코미디언 송은이의 인생 드라마라는 <나의 아저씨>(2018년 방송)에 가리늦게 빠져 산다. 드라마를 보면서 '좋은 어른이란 무엇인가'라는 거창한 담론까지 생각해 본 적 없다. 그저 딴 나라 딴 사람이 아닌 지금-여기에서 벌어지는 내 실제상이라는 일체감에 먹먹했던 훈훈한 드라마라고 자평하고 싶을 뿐이다.

이 드라마의 미덕은 대사에 있다고 본다. 억시기 고상하고 철학적인 수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가 평상시에 쓰는 말들로도 사는 게 도대체 뭔지를 곱씹어 보라며 종주먹을 들이대는 것 같은 대사는 그야말로 주옥같다. 16부작 드라마 분량에 버금가는 화수분처럼 쏟아지던 명대사 중에서도 유독 지금-여기에서 아등바등하는 나의 귀에 쏙 박혀서 용기 불끈 솟게 만드는 당의정같은 대사를 꼽아본다.

백수인 상훈(박호산 분)과 기훈(송새벽 분) 형제가 청소업체를 시작하면서 고사를 지내는 장면이다. 후계동 조기축구회 회원이자 절친인 제철(박수영 분)이 덕담이랍시고 형제들의 어머니(고두심 분)에게 이렇게 뇌까린다.

- 오십 넘으면 다들 이러고 살아요 어머니. 자동차회사 다니던 진범이 지금 미꾸라지 수입해요. 은행 부행장하던 권식이는 모텔에 수건 대고. 공부해서 다니는 직장 끽해야 20년이예요. 백수 인생에 한 직업으로 살기 지루하죠. 서너 개 해봐야 지루하지 않고 좋죠.

이 드라마에 배경처럼 등장하는 후계동 조기축구회 회원들은 모두 구김살이 없다. 자신들의 삶에 만족하는 것 같았고 내세울 것 없는 처지인데도 남을 배려할 줄 안다. 지안(이지은 분)의 할머니 장례식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자칫 드라마 설정 상 평면적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을 이들이 나한테만큼은 개연성 짙게 입체적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내가 그 지루하지 않게 살아온 전력의 소유자여서겠다. 이름 대면 알 만한 보험회사 본사 직원에서 뒤웅박 팔자로 전락한 백수로, 파리 날리기 십상인 포장마차 주인으로, 9개월짜리 계약직으로, 지금은 이발소 주인으로. 가족들이야 죽을 맛이었을갑세 당사자는 한시도 지루한 적 없었던 파란만장을 즐기긴 했다. 대학 공부로 먹고 살 것 같았으면 국어 교사가 제격이었겠으나 설령 교단에 서있다 한들 곧 닥칠 정년 이후를 고민하는 처지일지 모를 일이다. 말이 좋아 인생 이모작이지 이순이 지척인데 뭔가를 새롭게 벌이는 건 큰 모험이 아닐 수 없다. 아니면 어영부영 허송세월로 귀하디 귀한 노년의 시간만 축낼지 알 길이 없다.

제철의 대사 '공부해서 다니는 직장 끽해야 20년'에는 많은 걸 함의한다. 자기 분야에서 승승장구하며 꽃길을 걷는 이를 폄하할 마음 전혀 없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직업적 소명의식에 투철했고 그로 인해 얻어낸 값진 성취를 상찬받아 마땅하다. 그럼에도 끽해야 20년 뒤, 그러니까 나이 서른에 성공가도를 달려 그로부터 20년 뒤인 쉰이라는 깔딱고개에 맞닥뜨린 당신은 그간 끼어 있던 영광의 거품기를 쏙 뺀 가장 담백한 상태로 인생 후반이라는 새 도화지에다 지루하지 않을 당신을 데생해야 한다. 강조하건대 내 권유의 방점은 '지루하지 않을'에 찍혀 있다. 후계동 조기축구회 회원들이 <정희네> 가게에 모여 '후계! 후계! 후계! 잔을 비우게!'를 외치며 고단했던 하루를 구김살없이 마감할 수 있는 그 원동력을 탐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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