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선수가 이기고 지는 건 병가지상사인 양 흔한 일인데도 다섯 번 붙어 다 졌다면서 딱 들어도 풀이 확 죽은 목소리로 막내딸한테서 연락이 왔다. 올해 들어 첫 출전인 펜싱 대회 나가려고 금요일 충북 제천으로 떠났던 막내딸은 토요일 아침 9시 첫 시합부터 줄줄이 패배를 당해 크게 낙담했다. 막내딸 뛰는 걸 보던 코치(작년 말 새로 부임했으니 막내딸 뛰는 경기는 처음 봤다)가 칼로 찌르는 손 동작이 느리다는 평을 내놨단다. 전문가의 날카로운 지적이니 응당 받아들여 고쳐 나갈 대목이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 기운 꺾인 꼴은 아비된 입장에서 또 못보겠어서 져야 이길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둥 이참에 약점을 알아냈으니 보완해 다음 번 시합에서 이기면 된다는 둥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달랬다. 낙천적인 엄마 기질을 빼닮은 막내딸이라 따뜻한 위로 몇 마디에 침울해하던 기분 훌훌 털어낸 듯 목소리가 밝아 다행스러웠지만 전화를 끊고 아비는 문득 생각이 많아졌다.
언니모양 욕심이나 많으면 어떡하든 그걸 채우려고 아등바등거릴 텐데 갖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게 딱히 안 보이니 집념이랄지 억척 따위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막내딸을 마누라는 늘 걱정했다. 도달할 고지가 비록 높다 한들 일단 시도는 해본다는 언니의 애살이 동생한테도 고스란히 이어지길 바랐던 마누라였지만 언니와는 판이한 초등학교 생활을 목도하고 기대는 진작에 내려놨다. 까다로운 숙제나 어려운 문제에 맞닥뜨렸다 치자. 아득바득 기어이 해내고야 마는 언니와는 달리 힘이 부치고 마음이 고단하면 일단 울고 보는 막내딸이었다. 충북 촌구석에서 8녀1남의 일곱째 딸로 살며 생존 방식 하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터득한 마누라 입장에서는 막내딸의 찌질한 꼴에 안타까움 이전에 골부터 났던 건 어쩌면 당연했는지 모른다. 그리 나약해서야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헤쳐 나갈 거냐는 흘러간 유행가의 한 소절을 닮은 핀잔을 입에 달고 살던 마누라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그 피가 어디 가지는 않아서 유약하기 짝이 없는 내 결을 빼다 박은 막내딸을 감싸 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녀석이 품 안의 자식일 리 없으니 마누라 말마따나 험한 세상 헤쳐 나갈 궁리를 서서히 해나가는 게 맞긴 한데 뾰족한 수가 안 보이니 그게 문제였다.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 아이돌이 되겠다며 엄마한테 떼를 써 친구들 따라 댄스학원엘 다녔지만 아니다 싶었는지 한두 달 만에 흐지부지 끝났다. 중학교에 들어가 진로교육이라는 걸 접한 뒤로 몇몇 직업에 흥미가 일었지만 반짝하다 말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하고는 싶은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막내딸의 반응에 삶을 스스로 개척하겠다는 의지가 슬쩍 엿보여 한편으로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갈팡질팡하다 좋은 시절 다 탕진하는 건 아닌지 또 한편으로는 걱정이 대단했다. 그런 녀석에게 행운처럼 다가온 게 펜싱이었다.
나나 마누라는 막내딸이 펜싱선수로 대성하길 바라는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다. 승승장구해서 여봐란듯이 꽃길만 걷는 내일이 나쁘지 않지만 그보다는 하고 싶은 바를 원없이 누리면서 자존감을 고취시키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바람이자 목표다. 발을 담근 분야에 익숙해지다 보면 더 잘할 방법이 뭔지 골똘히 탐구하게 되고 하여 다음 행보가 뭔지 제 진로를 자연스럽게 구상할 거라는 기대와 함께. 아니나다를까 중3이 되면서부터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 앞가림에 관해 말을 걸어오는 일이 잦다. 부산에는 사브르 종목을 택한 여자 중학생이 들어갈 수 있는 고등학교가 한 군데 있다. 녀석은 거기로 진학해 펜싱 선수로 기반을 닦은 뒤 체육학과를 전공해 체육 교사가 되면 어떻겠냐는 의사를 슬쩍 내비쳤다. 가는 길이 쉽지는 않겠지만 흔쾌히 녀석의 뜻을 존중했다. 다만 계획을 보다 구체화시키자면 해당 분야를 잘 아는 사람, 이를테면 학교 체육선생님이나 펜싱코치와 진지하게 상의해보는 게 우선이라고 일러 줬다. 낯을 되우 가리는 편인 녀석이 선뜻 그러겠노라 맞장구를 치자 드디어 미래를 향한 진지한 발걸음이 시작됐음을 직감하고 가슴 뭉클했다.
이번 대회에서 5전 전패한 막내딸은 어쩌면 자기가 계획했던 바가 초장부터 틀어진 데 대해 실망이 컸을지 모른다. 원하는 고등학교 진학을 위한 스펙을 차곡차곡 쌓아도 시원찮을 판에 패자의 굴레만 짊어지다 보니 깜냥이 아닌 건가 의구심이 혹여 들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내 막내딸은 금세 훌훌 털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낙관과 강단을 겸비했다고 자부하는 바 큰 염려는 없다. 더불어 시합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꼭 당부하고 싶다. 세상으로 나서는 길 꼭 외길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펜싱 연습할 때면 기분이 좋아지듯 꼭 펜싱이 아니더라도 기분이 좋아질 다른 길도 분명 또 있다고, 즐겁고 행복하게 인생을 살 기회는 네 앞에 무궁무진하니 우리 너무 안달복달하지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