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적인 장사

by 김대일

저녁 7시가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슬슬 마감을 준비하려고 손님들이 쓴 수건을 빨고 있는데 가게 문을 열고 양복 입은 중년 남자가 스윽 들어왔다. 들어오긴 했는데 어째 굽신굽신거렸다. 그러곤 부친 가게를 갑자기 들먹였다. 호구 조사하듯 관계를 묻는데 뭣이 궁금한 건지 좀 뜬금없었다. 참고로 부친 가게와 내 가게는 버스 정류장 한 코스 거리에 있다. 부친은 부자가 다 해먹는다는 소리 듣기 싫다며 아들 대신 부친 밑에서 견습한 직원이라고 둘러대라고 당부하셨다. 기술 배우려고 잠깐 적을 뒀을 뿐이라고만 눙친 뒤 얼른 커트 의자로 안내했다. 그런데 이 남자 본론은 정작 딴 데 있었다.

- 제가 이 동네 산 지 40년이 넘었는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집밖을 안 나간 지 오래됐습니다. 하도 오래 처박혀 지내다 보니 머리꼴이 말이 아닌데 돈은 없고…. 이번에 아량 베푸시면 두고두고 은혜 잊지 않고 형편이 나아지면 그때 꼭 갚겠습니다.

룸펜. 상황은 금방 파악했고 내 결정만 달렸다. 허여멀쑥한 면상에 양복 갖춘 입성까지 겉으로는 멀쩡한 사람이 무전이발을 통사정하는데 나 몰라라 하긴 뭣했지만 이발한 지 예닐곱 달은 넘어 보이는 덥수룩한 두발을 다듬자면 보통 작업시간으로는 어림없어 좀 난감했다. 알바할 때 비슷한 꼴로 커트해 달라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축 늘어졌었는데 그걸 장교머리모양 단정하게 깎아달라는 거였다. 부아가 치민 원장이 다 깎고 나서 원래 요금보다 1.5배를 더 요구했다. 저렴한 커트점에 장발을 해가지고 들어오는 건 상도가 아니고 이왕 들인 공력과 시간이면 초과 요금을 요구하는 건 당연하다는 어필이었다. 근데 내 앞에서 쭈글스럽게 굴신하고 있는 이 중년 남자한테서는 초과 요금은커녕 무료 봉사를 베풀 형편이니.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가발 판매점에서 인모 100%짜리 통가발 한 개 값이 보통 8만 원을 호가한다. 마음먹고 제대로 커트 연습할라치면 8만 원을 들여야 하는데 공짜로 인모 100%짜리 통가발이 아닌 사람머리를 앞에 두고 연습을 하니 여간 수지맞는 게 아니라고. 가뜩이나 하루 죙일 손님들 머리 깎아놓은 꼬락서니가 하나같이 수틀려 영점조정을 다시 해야 할 판이었는데 마침 잘 됐다 싶기도 했고.

깎은 지 이삼 주 지나 가겔 찾는 머리는 넉넉잡아 10분이면 다듬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중년 남자는 20분 넘게 집적거리고서야 겨우 사람 머리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바닥에는 머리카락이 수북히 쌓였다. 긴 머리카락이 널부러져 있으면 이발사인 내가 봐도 어떨 땐 을씨년스럽다. 뒷면도를 끝내고 커트보를 거둔 뒤 벽시계를 쳐다보니 7시 20분이었다. 중년 남자가 쭈뼛대며 가게 문을 들어온 게 6시 50분. 30분이란 시간이 3시간 같았다.

연신 고맙다며 굽신대는 그를 향해 한 음절 한 음절 강세를 넣어 또박또박 을렀다.

- 다음에 오시면 요금 꼭 받습니다.

장사는 일상적인 게 가장 좋다. 변수가 많으면 재미 없고 불안하다. 제값 치르는 손님이 들어와야 정상적으로 가게가 돌아간다. 부친은 그 사람 다음 번에 오거들랑 못 받은 요금까지 꼭 다 받으라고 당부하셨다. 장사는 무료 봉사가 아니라고도 덧붙이시면서. 지당하신 말씀이다. 나는 내가 착한 사람이 못 된다는 걸 잘 안다. 내 코가 석 잔데 남 생각 할 겨를이 당장은 없다. 하여 마감 손님이 공짜 손님이었다는 게 그가 내 연습 교보재로서 더할 나위 없이 유용했을지 모르나 속은 좀 쓰리다. 매달 1일이 월세 내는 날이고 채 이틀밖에 안 남았기에 더 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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